1971년 4월 10일 미국 탁구 대표단이 중국을 방문했고 이틀 뒤 관중 1만 8000명 앞에서 미·중 간 탁구 친선경기가 진행됐다.이는 6.25전쟁 이후 다른 이념 아래에서 냉랭했던 미·중 관계를 개선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민간 스포츠 부분에서의 교류는 곧 양국 정상 간의 교류로 이어졌고 결국 1979년 미·중은 공식 수교를 맺었다. 이념이 다른 두 국가가 손을 잡은 것은 소련 견제에 대한 이해관계가 일치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중국과 연대해 당시 냉전 중인 소련을 상대로 일종의 포위망을 구축할 필요가 있었다. 중국은 국제적 고립
태종 4년 2월 8일 네 번째 기사에 “친히 활과 화살을 가지고 말을 달려 노루를 쏘다가 말이 거꾸러짐으로 인하여 말에서 떨어졌으나 다치지는 않았다.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니 “사관이 알게 하지 말라””라는 내용을 사관들은 있는 그대로 적었다.권력 앞에 숙이지 않는 직업이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이 높이 평가받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한 이 직업은 바로 사관이다. 이들은 역사를 기록한다는 책임을 가지고 기록을 남겨왔다. 사관이 쓴 기록들은 객관성을 유지해야 한다. 사관들은 당시의 왕이 눈을 감을 때까지 철저히 비밀에 부치고 본인이 직접 쓰
2021년 1월 관세율 513%로 쌀 수입 시장이 완전 개방됐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쌀 개방에는 오랜 역사가 어려 있다. 1992년 대한민국은 ‘우루과이 라운드’라는 다자간무역협상에서 농산물 전면개방을 요구받았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국내 농업계는 외국 쌀 수입이 국내 쌀 가격 하락과 농가 파산을 초래할 것이라며 협상을 강력히 반대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직을 걸고서라도 우루과이 라운드에서 쌀 개방만큼은 막겠다고 했지만 결국 부분개방을 피하지 못했다. 실제로 쌀 가격은 하락했고 일부 농가는 어려움을 겪었다.이에 정부는 농기
1862년 11월 21일 파리 고등법원에서 사진을 예술로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판결과 사진기의 발달이 맞물려 미술계에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당대 유행하던 화풍은 눈에 보이는 형상을 그대로 모방하는 방식이었다. 화가들은 왕족과 귀족의 초상화를 그리며 카메라와 다르지 않은 노동으로 부를 축적했다. 당시의 왕립 아카데미에서 진행한 미술 교육에서도 화가들의 주관적 의도가 배제된 획일적인 화풍을 강요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러한 화풍을 고집하던 화가들은 그림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모습을 정밀히 담아내는 사진기의 등장 이후 설 자리를 잃었다
2016년 11월 4일 기후변화의 위협에 대해 전 지구적 대응을 강화하자는 파리협정이 공식 발효됐다. 파리협정은 산업화 전 수준 대비 지구 평균 온도 상승을 1.5°C로 제한할 것을 합의하고 각 국가가 스스로 결정한 온실가스 감축목표를 이행토록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하지만 지난 4월 세계기상기구(WMO)는 2015년 파리협정은 실패했다"고 선언했다. 지구 표면의 평균 온도가 산업화 이전인 1850~1900년보다 1.15°C 높아졌고 현재부터 2027년까지 1.5℃ 이상 높아질 가능성이 66%로 추정된다. 시간이
1994년 10월 21일 대한민국에서 한강 다리가 무너졌다.이날 0시 20분부터 철판이 성수대교 상판 이음새에 깔려있다는 신고가 들어왔고 서울특별시(이하 서울시)는 상판 벌어진 틈새를 덮는 응급조치를 취했다. 균열은 갈수록 커졌지만 서울시는 추가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결국 오전 7시 48분 성수대교 가운데 상판 48m가 내려앉으며 사고 지점을 통과 중이던 시내버스 1대 승합차 1대와 승용차 4대가 이음새와 함께 한강으로 추락하며 사망자 32명과 부상자 17명으로 49명의 사상자를 냈다.성수대교 붕괴의 주된 원인은 동아건설의 날림
1948년 9월 22일 제헌국회가 반민족행위처벌법(이하 반민법)을 발의했다. 이후 반민법에 의거해 일제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가 출범했으며 국민들의 지지 아래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이승만 정권은 자신의 이권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는 친일파를 보호하고자 반민특위의 활동에 제동을 걸었다. 결국 이 정권의 지속적인 와해 공작에 반민특위는 1949년 10월 4일 해체의 수순을 밟았다.지난달 25일 육군사관학교(이하 육사)가 믿기 어려운 내용의 성명문을 언론에 배포했다. 육사 내에 설치된 독립군과 광복군 영웅 5인의
1884년 8월 31일 새벽 목이 졸려 살해당한 한 여성의 시체가 발견했다. 화이트 채플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 일명 ‘잭 더 리퍼’의 첫 번째 살인이다. 이후 그는 공식적으로 총 5번의 연쇄 살인을 통해 영국 전역을 공포에 빠트렸다. 대대적인 언론 보도에 따라 빅토리아 여왕까지 나서 수사를 지시할 정도로 사태의 심각성은 커졌다. 현재까지 진범을 찾지 못한 화이트채플 연쇄 살인은 완벽한 영구미제로 남아있는 사건이며 잭 더 리퍼의 잠적으로 끝을 맺었다. 공식적으로 5명의 피해자를 남긴 화이트채플 연쇄살인 사건은 언론에
1987년 6월 10일 오후 여섯 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분노한 시민들은 “호헌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며 거리로 나섰다. 스무날의 항쟁에서 백골단은 사과탄과 최루탄을 난사하며 시위대를 진압했다.격렬한 대치 과정에서 잔인한 군부 독재를 향한 시민의 분노는 더욱 폭발했다. 넥타이를 맨 시민은 시위대를 폭력으로 진압하던 전경에 맞서 박수를 치며 비폭력을 외쳤다. 전경에게 장미꽃을 주며 학생과 전경 모두 우리의 아들딸이므로 최루탄을 쏘지 말 것을 부탁하는 어머니들의 모습도 발견됐다. 누구보다 서로를 생각하던 시민과 시민의 마음이
‘어린이를 윤리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해 그들에게 완전한 인격적 예우를 허하라. 어린이를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해 그들에 대한 노동을 폐하게 하라. 어린이들이 고요히 배우고 놀기에 족할 사회적 시설을 행하게 하라’위 글은 방정환 선생과 김기전 선생이 주도한 소년운동 선언의 일부다. 세 문장을 통해 어린이를 노동과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키고 놀 권리를 보장할 것을 주장했다.‘해방’을 중심으로 어린이 운동이 펼쳐지자 일제는 어린이날 행사를 방해했다. 심지어 1937년에는 소년운동협회를 해산시키며 우리나라의 어린이 해방을 막아 섰다. 그 이유
1990년 4월 파업 도중 정부의 무력 진압으로 수세에 몰린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원들은 골리앗 크레인에 올라가 이렇게 외쳤다. “골리앗 위에 있는 우리 전원은 죽을 수는 있어도 물러서지 않기로 결의했습니다.” 이들의 투쟁은 5월 전국총파업으로 이어졌다. 이때 가두시위에 최루탄이 날아들고 전철역이 점거됐다. 하지만 시민들은 흩어지지 않았고 박수로 호응했다. 82m 고공에서의 극한 투쟁은 전국총파업의 발단이 됐고 민생 파탄에 신음하던 국민에게 울림을 줬다. 그렇게 일개 노동조합의 파업은 ‘골리앗 투쟁’이라 이름 붙여졌고 1990년 노동운
1908년 3월 8일 1만5천여 명의 노동자들이 여성 참정권을 외치며 뉴욕 거리를 행진했다. 이후 UN은 이를 기념해 3월 8일을 세계 여성의 날로 지정하게 됐다. 여성들의 이야기는 178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인간은 누구나 평등하게 태어났다. 프랑스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의 첫 문장이다. 하지만 그 인간의 범주에 여성은 제외됐다. 여성은 인간으로 대우받지 못했다. 여성은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고 학교에서 교육받을 수 없었다. 이에 분개한 올랭프 드 구즈는 여성도 남성과 같은 권리를 갖는다는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 선언’
1997년 2월 22일 로즐린 연구소에서 복제 양 돌리의 탄생을 발표했다. 세상은 체세포 이용 포유동물 복제는 불가능하다는 상식이 깨졌다는 점에 크게 주목했다. 미숙한 단계의 배아세포로 진행됐던 이전의 생명 복제에서 나아가 성인 양의 체세포에서 새로운 배아세포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돌리의 탄생을 위해 2백77마리에 달하는 양들이 희생됐고 돌리조차도 만 6년 7개월 만에 진행성 폐질환으로 안락사됐다는 사실은 쉽게 잊혀졌다. 돌리는 품질 좋은 식용 가축을 공장처럼 찍어낼 수 있을 거라는 기대 가운데에서 탄생했다. 돌리 이후 생명복
1898년 12월 26일 퀴리 부인이 ‘라듐’을 발견했다. 라듐은 어두운 곳에서 빛을 내는 새로운 원소로 주목받았고 몸에 좋다고 여겨졌다. 라듐을 이용한 치료부터 라듐 초콜릿 그리고 라듐 생수에 이르기까지 라듐의 사용 가능성은 무궁무진해 보였다. 그러나 라듐은 빛 좋은 개살구였고 이를 가까이한 사람들은 방사선 피폭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라듐의 위험성을 널리 알린 이들은 일명 ‘라듐걸스’다. ‘라듐걸스’는 1917년 전후로 ‘U.S. radium corporation’의 공장에서 도색 작업 중 피폭 당한 여성 노동자들을 의미한다. 공
1999년 11월 1일 대우그룹이 해체됐다. 부산의 소규모 봉제 업체로 시작한 대우그룹은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던 김우중 회장의 공격적인 경영하에 수십 년이 흐른 후 29개의 계열사를 지닌 재계 3위의 대기업으로 성장했다.이처럼 몸집을 불려가던 대우그룹이 해체된 배경에는 IMF 금융위기 속 김 회장의 결정이 있었다. 금융위기 속에서 삼성전자는 자산매각과 인력감축 등을 통해 현금을 확보하는 등의 구조조정 전략을 취했다. 반면 대우그룹은 ‘세계경영’ 전략을 택했다. 만성적 적자와 부채에도 외려 은행으로부터 차입금을 늘려 투자를
2008년 10월 22일 인도 최초의 무인 달 탐사선 찬드라얀 1호가 발사됐다. 성공적인 발사로 인도가 일본과 중국에 이어 아시아 세 번째 세계적으로는 6번째 달 탐사국으로 인정받으며 우주강국으로 우뚝 섰다.우리나라 역시 지난 8월 5일에 첫 달 탐사선 다누리를 발사했다. 성공 시에는 세계 7번째 달 탐사국 지위에 오른다. 또한 지난 6월 21일에는 저궤도 실용 위성 발사용 로켓인 누리호 발사를 성공적으로 이뤄내 세계 11번째 자력 우주로켓 발사국이 됐다. 1인당 GDP가 2천3백42달러에 불과한 인도가 우리나라보다 10여 년이나
9.11 테러는 2001년 9월 11일에 이슬람 근본주의 무장조직 알카에다가 항공기를 납치해 벌인 테러 사건이다. 오사마 빈라덴이 이끄는 알카에다는 납치한 항공기를 이용해 뉴욕 맨해튼의 세계무역센터와 워싱턴 D.C의 국방부 청사 건물 펜타곤을 공격했다. 백악관과 의사당도 목표물로 노려졌다. 이 사건으로 3천 명에 가까운 사망자와 최소 2만 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대규모 사상자를 발생시킨 이 사건은 전 세계를 충격에 빠트렸으며 오사마 빈 라덴을 주축으로 한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에 대한 응징론이 대두됐다.팔레스타인 이스라엘 분쟁
한국은 중국의 과거부터 깊은 관계를 맺은 국가로서 역사에서 서로 상당 부분 영향을 끼친 국가들이다. 하지만 이후 이념의 차이와 한국전쟁 이후 두 국가는 적대적 관계를 유지해왔다. 그러나 1992년 8월 24일 중국 베이징 댜오위타이에서 이상옥 당시 한국 외무장관과 첸치천 중국 외교부장이 한중 외교관계 수립을 위한 공동성명에 서명하며 한국과 중국은 적대적 관계를 뒤로하고 협력과 상생의 새로운 길을 마련했다. 이 공동성명은 당시 노태우 정부의 외교적 성과로 꼽히는 ‘북방정책’의 대미를 장식했다고 평가받는다. 적대적 관계를 청산하고 수교
본래 ‘빨갱이’는 공산주의 게릴라 유격대를 부르는 말이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빨갱이’의 의미는 도덕적으로 파탄난 비인간적 존재 혹은 국가와 민족을 배신한 선동자로 바뀌면서 그들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탄압받았다. 1950년 6월 하순부터 보도연맹원의 학살은 남한의 후퇴에 따라 전국적이었다. 그 중 ▲공주 ▲대구 ▲대전 ▲목포 ▲전주 ▲진주 형무소의 학살사건에서는 약 20만 명에서 1백20만 명이 사망했다.특히 ‘공주 왕촌 살구쟁이’는 1950년 7월 초 공주형무소 재소자와 국민보도연맹원 그리고 민간인이 최소 4백여 명이 학살
1991년 5월 3일 아프리카의 언론인들과 유네스코가 나미비아 빈트후크에 모여 ‘언론 자유 원칙에 관한 빈트후크 선언’을 발표했다. 이는 언론의 독립성과 다원주의에 관한 자유 원칙 선언이다. 1993년 빈트후크 선언을 기념하는 의미로 유엔총회는 5월 3일을 세계 언론자유의 날이라 지칭해 국제 기념일로 지정했다. 세계 언론자유의 날은 언론이 자유롭게 ‘공익으로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도록 정부의 위협으로부터 언론의 표현의 자유를 보호한다는 취지의 날이다.국경 없는 기자회에 의하면 지난해 우리나라의 언론 자유도는 42위로 아시아 1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