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빨갱이’는 공산주의 게릴라 유격대를 부르는 말이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빨갱이’의 의미는 도덕적으로 파탄난 비인간적 존재 혹은 국가와 민족을 배신한 선동자로 바뀌면서 그들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탄압받았다. 1950년 6월 하순부터 보도연맹원의 학살은 남한의 후퇴에 따라 전국적이었다. 그 중 ▲공주 ▲대구 ▲대전 ▲목포 ▲전주 ▲진주 형무소의 학살사건에서는 약 20만 명에서 1백20만 명이 사망했다.

특히 ‘공주 왕촌 살구쟁이’는 1950년 7월 초 공주형무소 재소자와 국민보도연맹원 그리고 민간인이 최소 4백여 명이 학살된 곳이다. 진상규명을 노력하고자 2007년 5월 참여정부 시절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은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를 편성했다. 진실화해위와 충청남도는 유해발굴사업을 통해 다섯 개의 구덩이에서 모두 3백97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이에 공주시는 희생자들을 위로하고 화해와 상생을 도모하는 의미로 7천만 원의 예산을 반영해 ‘충남 공주 왕촌 살구쟁이 위령비’ 건립사업을 추진했다.

그러나 공주 상왕3통 주민들에게는 고작 17제곱미터(약 5.15평) 땅에 세워질 작은 위령비가 달갑지 않았다. 재산권 피해와 혐오감을 조성한다는 이유를 내세우며 마을주민 3백여 명은 진정서를 공주시에 제출했고 현수막을 매단 트랙터 시위는 아직까지도 진행 중이다. 일부 주민들은 “빨갱이들이 죽은 곳에 무슨 위령비냐”며 반대하는 중이다. 심지어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도 ▲보상(배상) ▲전국 단위의 위령시설 ▲추가 유해 발굴 ▲평화공원 설립 등의 사안에 대한 권고는 이뤄지지 않았다.

‘기억의 해법’은 사건을 촉발시킨 상황과 정신을 기억함으로써 이와 같은 비극의 재발을 막자는 의미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겪은 우리는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참회하기 위해 1995년 12월 21일 ‘5·18 특별법’을 제정했다. 그리고 1997년 5월 16일 세워진 ‘5·18 민주화운동기념비’는 많은 정치인들이 거치는 다짐의 장소다.

끔찍한 학살로 인한 유족들의 아픔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잊고 싶지만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것이며 그렇다고 기억하기에는 괴롭다. 한국사회의 깊은 이념갈등으로 희생자의 가족들은 좌익이라는 낙인과 연좌제의 고통을 겪었다. 최근 피해자와 가족들은 세상밖으로 나와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을 요구하고 있다. 공주 상왕 3통 주민들은 사건상황과 정신을 철저히 기억함으로써 비극의 재발을 막자는 기억의 해법이 필요하다. 조지 버나드 쇼는 “역사가 되풀이되고 예상치 못한 일이 반복해서 일어난다면 인간은 얼마나 경험에서 배울 줄 모르는 존재인가”라 말했다. 위령비를 통해 억울하게 죽은 살구쟁이의 영혼을 위로하고 미래의 우리에게 교훈을 남겨야 한다. 우리는 부끄러운 과거를 겸허히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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