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에 일류(日流)가 불고 있다. 애니메이션부터 J-POP 그리고 일본 여행까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번화가를 지나다 보면 일본어로 표기된 간판이 보이고 일본 노래가 들려온다. 그러나 25년전만해도 일본문화는 엄금되는 것이었다. 1998년 10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일본 대중문화 개방 이전까지 우리 사회에 일본 문화에 대한 금기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개방 초기에는 문화적 격차와 역사 문제로 갈등도 있었지만 서로의 문화를 향유하며 양국은 상호 이해를 높여왔다. 그간 양국은 어떤 상호 작용을 해 왔는지 알아보자.

일본여행 안 간 사람 못 봤다

일본정부관광국(JNTO) 통계를 보면 지난해 1월부터 6월까지 일본을 방문한 관광객은 총 1072만여 명. 이 중 한국인이 313만명으로 전체의 29.2%를 차지한다. 지난 3·1절 연휴 일본여행 패키지상품의 예약률은 95%에 달하며 일본행 항공편 좌석 역시 대부분 매진됐다.

특히 젊은 세대에서의 열풍이 더 크다. JNTO에 따르면 2012년부터 2021년까지 일본을 찾은 한국인 중 2-30대의 비율은 45.7%에 이른다. 이들은 일본 여행의 정수인 쇼핑과 음식부터 메이드카페 등 새로운 핫플레이스를 경험하기 위해 찾고 있다. 설 연휴에 도쿄에 다녀온 박준식(25) 씨는 “메이드카페에 방문했는데 한국인 손님이 꽤 보여서 놀랐다”며 “몇 년 전만 해도 메이드카페를 찾는 한국인이 거의 없었는데 유명 관광지를 넘어 진정한 현지 문화를 탐방하려는 관광객이 늘어나는 것 같다”고 전했다.

한편 방한 일본인 관광객도 증가하고 있다. 지난해 1월부터 9월까지의 일본인 관광객 수는 158만 명으로 중국인 관광객을 넘어서며 외국인 관광객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일본인 여행객의 ‘한국 관광 붐’ 배경에는 ‘K-문화’ 유행과 한일관계 개선으로 꼽힌다. 특히 한국 문화의 주요 소비자인 2-30대가 여행객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한일 관계에서 젊은 층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니혼게이자이신문의 국가별 선호도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을 '좋아한다'는 응답이 37%로 2015년 이후 역대 최고 수준으로 나타났다.

1998년 일본 대중문화 개방

25년 전만 하더라도 당시 남아있던 반일 감정으로 일본 여행을 비롯해 일본 문화를 즐기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 그러나 1990년대의 개방적 분위기와 함께 암암리에 일본 문화가 소비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해적판 비디오나 일본노래 표절 문제가 화두에 오르며 합법적 개방의 필요성이 요구되기 시작했다. 박성빈(행정) 교수는 “97년 외환위기 당시 일본이 경제적으로 도와주며 김대중 오부치선언의 발판이 됐다”고 전했다 이어 집권한 김대중 정권은 1998년 10월 ‘김대중 오부치 선언’을 통해 일본과의 우호 협력을 표방하고 일본의 대중문화를 한국 내에서 단계적으로 개방해 나간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1998년 영화 ‘카게무샤’와 ‘하나비’ 개봉을 시작으로 2000년에는 게임 2004년에는 방송콘텐츠를 제외한 모든 분야를 개방하게 된다.

개방 당시에는 일본 소설과 영화가 주목받았다. 먼저 일본 소설은 특유의 담백한 문체와 잔잔한 감동으로 한국인들을 매료시켰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 오에 겐자부로는 ‘만엔원년의 풋볼’과 ‘오키나와 노트’ 등 전후 평화 재건과 전쟁 피해 고발 등 현대 시사를 삶과 문학의 주제로 끌어안았다. 일본소설은 2000년대 중반부터 국내 소설시장의 30% 내외를 점유하며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일본 영화도 ‘러브레터’를 시작으로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가 인기를 끌었다. 특히 ‘러브레터’는 1999년 개봉 이후 한국에서 무려 6차례나 재개봉할 정도로 한국 관객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여주인공의 대사 ‘오겡끼데스까(お元ですか)’는 온갖 패러디와 밈들이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김선희(국제) 교수는 “일본 문학과 영화의 경우 개방 초기부터 지속적으로 소비되며 일본 정서를 이해하는 기능을 해오며 현재 일본 문화 흥행의 기반을 다져 왔다”고 전했다.

일류(日流)가 분다

최근에는 소설과 영화를 넘어 애니메이션과 음악까지 인기를 끌고 있다. 일본 문학과 영화는 국내에서 선전해왔지만 J-POP은 K-POP과 한국 힙합의 성장 및 발전으로 높은 성적을 내기 어렵다고 여겨졌다. 2004년 국내 일본어 CD의 판매·유통이 정식 허용되며 당시 가요계에선 일본 음악이 국내시장을 잠식할 거란 우려까지 나왔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보니 J-POP은 특유의 일본색과 강한 개성으로 국민정서와는 맞지 않아 인기를 끌지 못했다.

최근 아이묭이나 이마세처럼 한국 시장 문을 조금씩 여는 이가 등장하고 있다. 지난해 한국 인기 유튜브 뮤직 주간 차트 상위 100위에 래드윔프스의 ‘스즈메’와 아이묭의 ‘사랑을 전하고 싶다던가’가 17위에 오르기도 했다.  최근 아이묭에 빠졌다는 공유빈(사학·4) 학우는 “J-POP의 깔끔하고 차분한 멜로디는 고독함과 불안한 느낌을 준다”며 “국내 아이돌 음악의 화려함에 질렸는데 J-POP에 신선함을 느꼈다”고 전했다.

최근의 J-POP은 일본의 전통적인 록음악과도 다르고 왜색이 강한 아이돌 음악과도 다르다는 점이 인기 요인으로 뽑힌다. J-POP 열풍의 선봉장인 이마세의 ‘NIGHT DANCER’는 걸핏 들으면 깔끔한 팝송이다. 이렇듯 대중적인 분위기로 탈피한 J-POP이 틱톡과 쇼츠를 만나며 폭발적인 인기를 끈 것이다. 박 교수는 “한류의 영향력에 자극받은 일본이 내수를 벗어나 해외로 눈을 돌리고 있다”며 “일본 정부에서 추진하는 쿨 재팬도 이러한 전략의 일환이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박 씨는 “2000년대 후반부터 X-JAPAN과 ZARD 등 일본 노래를 즐겨 들었는데 당시에는 친구들로부터 무시당하곤 했다”며 “지금은 J-POP이 한국에서도 널리 소비되는 걸 보니 일본 문화의 선구자가 된 것 같다”고 전했다.

일본 애니메이션에서도 한국 극장가를 폭풍질주 하고 있다. 지난해 1월에 개봉한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관객 수는 460만 명을 기록했고 스즈메의 문단속은 530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면서 ‘국내 개봉 흥행 1위 일본 영화’라는 타이틀까지 거머쥐었다. 이에 대해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한일 양국이 서로의 문화를 받아들이는데 저항이 없어진 것 같다"며 “일본의 것을 선호하는 것보다는 '좋은 콘텐츠' 또는 '재미있는 콘텐츠'를 장벽 없이 즐기는 현상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박 교수는 “이 같은 한국 2-30대의 행보는 문화적 친숙함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며 “2-30대는 1998년 일본 대중문화 개방 이후 영화와 애니메이션 등으로 교감을 이뤄왔으며 일본에 대한 호감도도 높다”고 말했다.

일본으로 넘어간 한국 문화

한편 한국문화도 일본에서 인기를 얻었다. 일본 대중문화 개방 초기 국내 문화가 잠식될지 모른다는 우려 섞인 시선도 있었지만 결과는 기우였다. 2003년 겨울연가 방영을 계기로 일본에서 한류 열풍이 시작됐다. 이어 2005년 드라마 ‘대장금’을 통해 자연스럽게 한국 드라마와 더불어 한국 음식이 인기를 얻었다. 2000년대 중반 카라와 소녀시대를 거쳐 2010년대 중반 BTS와 트와이스 등 K-POP의 인기가 부상하며 한류가 방송 콘텐츠를 넘어 문화 전반으로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랑의 불시착과 ‘이태원 클라쓰그리고 ‘사이코지만 괜찮아' 등 한국 드라마들이 일본 넷플릭스 1-3위를 몇 개월간 독식하기도 했다. K-POP의 인기도 이젠 대중 영역으로 스며드는 모양새이다. 기존 도쿄의 전통적인 번화가인 긴자나 하라주쿠에서 유행이 시작됐다면 이제는 코리아타운의 신오쿠보로 유행의 발산지가 옮겨가는 모습을 보인다. 특히 신오쿠보역은 여학생들이 좋아하는 역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이 같은 양국 문화교류에 이어 콘텐츠 분야에서의 한·일 전략적 협력이 활발하다. 최근에는 한미일 합작 애니메이션이 등장하기도 했다. 카카오 인기 웹툰 '나혼자만 레벨업'을 일본 회사 에이픽쳐스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해 미국에서 유통했는데 대히트를 쳤다.  박 교수는 “한국이 강점을 보이는 웹툰과 일본의 애니메이션 제작력이 전략적으로 손을 잡은 사례다”라며 “자동차와 같은 완성품 업계에서는 협업이 어렵지만 문화산업의 경우 상호협력이 가능하다”고 한일협력의 가능성을 언급했다.

문화만이 지닌 힘

일본 대중문화에 대한 개방조치가 시행되며 국내 문화산업 및 한일 문화교류의 양상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현재 일본 대중문화는 주로 뉴미디어를 중심으로 수용되고 있다. 김 교수는 “과거 일본 대중문화의 문화종속론이나 국내산업 보호론은 국내 문화산업이 경쟁력을 갖추며 불식되었고 저질문화 시비론은 유통 경로를 양지화 및 합법화하며 자연 소멸했다”며 “오히려 일본 내 한류 현상 이후로 한국대중문화의 세계시장 진출이 강조됐다”고 전했다.

한국은 과거 반일 민족주의에 의한 문화 쇄국에서 벗어나 일본 대중문화의 개방을 통해 양국 간의 우호 관계 구축을 위한 과감한 시도를 단행했다. 그리고 현재 일본에서는 양국 관계와는 별도로 지상파TV의 한국드라마 방영을 포함해 영화와 대중음악은 물론 패션과 식문화에 이르기까지 한국문화 수용의 다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문화 생산과 소비의 중심은 주로 젊은 세대에 있다. 기성세대에서 역사와 정치 문제를 문화와 연결시키는 경향이 있지만 젊은 세대는 이에 유연한 모습을 보인다. 한국리서치의 조사에 따르면 2-30대 45.1%(전 연령 39.5%)가 일본에 대해 호감을 가지며 이는 평균치 39%를 상회하는 수치다. 이어 박 교수는 “요즘 젊은이들은 여행은 여행이고 역사는 역사라며 분리해서 사고하는 경향이 있다”며 “일본의 문화와 여행은 즐기면서도 과거 역사문제에 대한 인식은 가지고 있다”고 전했다. 김 교수는 “대중문화 소비는 한 집단의 의미생산인 텍스트를 선택하고 해석하는 능동적 실천이다”며 “이러한 문화교류를 양국간에 폭넓게 이어갈 수 있다면 소통의 장치로 작동하며 미래지향적 관계 개선에 기여할 것이다”고 말했다.

한일 관계의 미래는 젊은 세대에 의해 주도될 것이지만 이를 위해서는 기반이 필요하다. 작년 양국 수도에서 열린 두 차례의 한일 정상회담에서는 경제와 안보 문제가 중요하게 논의되면서도 문화를 통한 미래 세대 간의 교류를 다방면으로 확대하기로 합의했다. 정치는 변화무쌍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집권 정당에 따라 외교 관계도 변동하곤 한다. 그러나 문화는 변함없이 안정성과 파급력을 유지할 수 있다. 문화는 특정 이념과 경쟁과 같은 요소들과는 별개로 누릴 수 있으며 서로의 마음을 열고 친밀함을 느끼게 한다. 4년전 불매운동이 무색하게 한일관계는 드라마틱한 반전이 일어나고 있다. 이것이 문화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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