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기사 쓰는 공대생이다. 글쓰기에 취약한 공대생으로서 기자에 지원하는 것부터 큰 용기가 필요했다. 주변에서 학보사가 어떤 곳인지 알아보려 수소문했지만 주변의 공대생 들은 학보사의 존재조차 몰랐다. 결국 학교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전직 기자와 연락이 닿아 모집 일정과 하는 일을 겨우 알 수 있었다.학보사 기자인 나는 내 전공 동기들과 많이 다르다. 학과 친구들은 전공 공부에서 조금이라도 더 앞서 나가기 위해 학기 중에도 공강시간에 학술동아리나 스터디 활동을 한다. 어떤 친구들은 자신의 실력이 부족하다며 방학 중에도 코딩캠프나 자격
본보에 쏟아야 하는 시간이 버거워 퇴사했음에도 ‘나의 글을 써냈던 시간’이 그리워 다시 돌아왔다.하지만 필자에게 본보는 여전히 어려운 공간이었다. 학교 혹은 사회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겠다며 야심 차게 써간 기사는 편집회의에서 늘 논의의 대상이 됐다. 그간 신문에 올라간 기사들과 문체와 형식 부분에서 미묘하게 다르다는 것이 이유였다. 기사에서 하고 싶은 말이 더 중요했으니 일련의 형식을 따르기는 뒷전이었다.기사를 수정하겠다고 자리에 앉았을 때 한 글자도 고치지 못하고 고민하는 시간이 더 길었다. 편집장의 수정 요
어린 시절부터 글로 표현하는 것을 좋아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을 글 속에서는 필자가 원하는 아름다운 언어들로 가득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본보에 들어온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글을 쓰는 공간에 들어가 다양한 사람들과 대화하며 외로운 독자에게 위로가 되어주는 따뜻한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러나 신문의 글은 내가 생각한 글과 달랐고 본보의 글은 형식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이에 따라 주관을 담기 힘들었고 가독성과 중립성을 지키고자 적었던 글을 수정하기 다급했다. 필자의 생각과 이야기를 글로 녹여내는 행복은 점차 흐려져 갔
학과 선배였던 편집장 앞에서 학보사에 들어가고 싶다고 자신 있게 술에 취해 소리치던 개강총회 날 결국 필름이 끊겼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막상 편집장을 학보사 면접에서 만나니 당황스러워 대답을 절었고 주장도 제대로 전하지 못했다. 다행히 학보사에 합격했지만 솔직히 며칠 동안은 면접을 진행했던 선배들을 보는 게 불편했다. 이는 필자의 학보사 생활에 부끄러움의 시작일 뿐이었다.수습기자 생활은 부끄러움의 연속이었다. 지금까지 써온 기사들에 대해 떠오르는 에피소드를 말하라면 부끄러웠던 기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특히 화성행궁 야간개장 축
본보 활동은 동아리와 확연한 차이가 있다. 여러 차이 중에서 두 가지를 고르자면 투자하는 시간과 에너지다. 시간에 맞춰 자유롭게 활동이 가능한 동아리나 소학회와 달리 본보 활동은 활동비를 지원받는 만큼 모든 활동에 필수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매주 12면의 신문을 완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회의한다. 자신의 할당량을 망치면 모두가 피해를 본다는 마음가짐으로 임한다.기사 작성은 순탄치 않다. 가독성과 중립성 그리고 기자의 주관까지 모든 요소의 적정선을 스스로 정해야 한다. 자신만만하게 써 내려갔던 기사가 다른 기자들의 눈에는 만족스럽지 않
입학을 하고 개강까지 꽤 많은 시간이 남아있었다. 입학한 뒤 무엇을 해야 의미 있을까 생각하며 에브리타임을 보던 중 우연히 학보사 수습기자 모집 글을 봤다. 학교 신문사를 해보고 싶었으나 시간이 없어서 하지 못했던 필자는 빠르게 포트폴리오를 작성해 학보사에 지원해 합격했고 스무 살 인생에서 첫 번째 도전을 시작했다.수습기자로 시작한 스무 살 첫 활동은 녹록치 않았다. 입학하기 전부터 학교 직원을 인터뷰하는 것은 모르는 사람에게 말 거는 것을 어려워하는 필자에게 더욱 쉽지 않은 일이었다. 또한 완성될 듯 쉽게 완성되지 않는 기사에 정
필자는 늘 촘촘한 일상에서 효율적인 움직임을 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산다. 숨 가쁜 일상 속에서 본보는 유일하게 비효율적인 공간이었다.본보는 비효율 그 자체다. 매주 2번씩 고강도의 회의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고 신문 마감 주가 되면 7일 중 5일을 신문 만드는 데 쏟아붓는다. 이런 시간과 힘을 다른 영역에 쏟는다면 무언가 성과를 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떠올랐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본보는 필자가 갇힌 효율과 능률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평소 같으면 빠르게 핵심만 파악할 글을 이곳에서는
그냥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좋아하고 것들에 대한 애정 가득한 글을 쓰고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일이 필자에겐 설레는 일이었다. 특히 사회 이슈나 사건을 전할 수 있는 글이 쓰고 싶었다. 각기 다른 색의 많은 기사로 채워진 학보는 필자의 희망사항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런 부푼 설렘을 안고 학보사 수습기자로 지원해 활동을 시작했다.수습기자로서 필자에게 주어진 처음 주어진 과제는 소재를 선정하는 일이었다. 본보에 소속된 것만으로도 기뻐 부푼 마음에 주변의 모든 것들이 소재로 보였다. ‘신도시의 장애인 보도블록
2학년이 되고 ‘대2병’을 겪으며 전공에 대한 불확신과 진로에 대한 고민이 심해졌었다. 이런 필자와 달리 주변 동기들은 교내활동이나 교외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었다. 신입생 시절의 열정은 이미 식었고 하나라도 끝까지 해내는 것이 없었다. 그 결과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마음에 우연히수습기자 모집 공고를 보고 신청했다. 운이 좋게 합격 문자를 받았지만 준비가 하나도 되지 않은 탓에 기쁨보다는 두려움이 컸다.열정을 찾고자 학보사에 입사했지만 동기 기자들의 능력에 오히려 위축됐다. 수습기자로 같이 입사한 학우들은 모두 기자의 꿈이 있거나
사랑하면 두렵다. 오랜 꿈인 영화가 두려워 도망친 곳이 학보사다. 사실만 쓰면 되는 기자 일이 딱히 어려울 것 같지 않았다. 유년시절부터 대학까지 잦은 글쓰기 과제로 글공장과 다를 바 없었던 필자에게 한두 장짜리 글을 생산하는 것이야 누워서 떡 먹기처럼 여겨졌다. 또한 인생 그 자체였던 영화도 포기했는데 무엇이 두려울까. 부조리한 사람들 따위에 흔들리지 않고 미친개처럼 진실만을 보도할 자신이 있었다. 영화 '택시운전사'의 힌츠페터처럼 모두가 꺼리는 현장에 목숨 걸고 싶었다.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은 ‘기자’라는 자만감
본보의 수습기자로 활동하며 3번의 마감을 거쳤다. 첫 신문에서 짧은 스트레이트 기사로 시작해 인터뷰 기사와 학술 기사를 작성하게 됐다. 글의 분량이 늘면서 글을 쓰는 시간도 길어졌다. 글이 늦게 나오니 동료 기자들과 퇴고하는 시간이 미뤄졌다. 668호 작성 당시 필자의 학술 기사는 해당 호의 기사 중 가장 늦게 완성됐다. “글이 너무 늦게 나온다”는 말을 듣고도 혼자서 계속 글을 부여잡고 있던 결과였다.필자의 글의 부족한 점을 마주하는 게 두려워 한 단어 한 문장에 온 힘을 쏟았다. 한 번에 완전한 글을 쓰려는 욕심을 부렸다. 퇴고
100% 생방송 좀비 영화를 찍고 있는 정신없는 촬영 현장. 배우들이 현장으로 오던 중 사고를 당하며 출연할 배우가 없자 감독과 감독의 아내가 배우로 나선다. 스태프들은 열의에 가득 차 촬영을 시작하지만 계획했던 생방송 동선은 꼬이고 각본과 설정을 수정해가며 겨우 생방송 영화를 찍는데 성공한다. 영화 의 줄거리다. 힘겹게 촬영을 마친 주인공 일행은 무사히 작품 하나를 만들어낸 것에 기뻐한다.학보는 하나의 연극이다. 학보사는 매달 연극 하나를 무대 위로 올린다. 그 과정에서 소품이 부서지기도 하고 극의 내용으
필자는 사회의 긍정적 변화에 기여하는 글을 쓰고 싶었다. 단대신문에서 수습 기간을 마쳤음에도 우리 학교로 학적을 옮기고 본보에서 수습기자 생활을 다시 시작한 것도 그래서였다.이미 한번 경험한 수습이기에 적응에 큰 무리는 없을 것 같던 예상과 달리 첫 기사부터 사고를 쳤다. 폭우로 인한 우리 학교 피해를 취재하다 한 취재원으로부터 교내 모 사무실에 정전 피해가 있었다는 제보를 받았다. 이에 시설팀에 확인차 연락을 취했지만 폭우와 정전 간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문의가 부서 간 오해로 번졌다. 필자는 필자대로 불려가 혼났고
수습기자로 활동한 지 어언 3개월 차다. 3번의 마감을 거치며 이번 학기 종강호까지 단 2번의 마감만이 남았다. 드라마 ‘청춘시대’에서 학보사 기자를 연기한 박은빈 배우를 보고 학보사 기자가 대학 생활의 로망이 됐다. 드라마를 통해 현장에서 발로 뛰며 취재하고 여러 인터뷰이와 접촉하며 다양한 정보를 배울 수 있는 기자의 모습을 기대했다.부푼 마음으로 첫 기사였던 지역 행사를 취재하고자 한국민속촌으로 향했다. 자신들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의 틈을 비집고 질문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편집장과 함께 있을 때는 인터뷰를 녹음하기만
‘프로불편러’라는 말이 있다. 과도하게 불편함을 제기하는 이들을 칭하는 단어다. 필자는 불편함을 불편해하는 사람이었다. 사회 문제나 현상에 대해 비판하는 것이 융통성 없게 느껴졌고 갑론을박을 첨예하게 다투는 이들에게 공감하기 어려웠다. 뉴스나 신문 속 집요하게 사회 문제를 파헤치는 기자는 내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새로운 일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으로 학보사에 지원했고 수습기자 활동을 시작했다. 막상 시작한 기자 일은 나와 맞지 않았다. 소재 회의에서 교내 날벌레 떼 문제나 교내 계단 보수 문제를 보도 안건으로 건의하는
학창시절 ‘기레기’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살았다. 기자들은 앉아서 글만 베끼고 특종만 찾는 사람들이라 생각했다. 선 넘은 기자의 질문에 화가 난적도 있다. 기자에 대한 불신은 언론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뉴스는 소통과 공감이 결여됐고 양산성의 기사가 가득하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나는 언론에 굉장한 거부감을 느꼈다.하지만 학보사에 들어오고 난 뒤 편견이 무너졌다. 언론은 우리사회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다. 663호에서 우리 학교 장애 학우의 어려움을 취재할 때 언론의 소중함을 체감했다. 장애학생에겐 사소하지만 치명적인 문제들이
‘읽는 사람이 많을까 쓰는 사람이 많을까?’. 자정을 넘긴 늦은 시간까지 신문 마감에 골머리를 앓을 때면 이 질문이 머릿속을 맴돈다. 대학신문이라는 매체 자체에 수요층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필자를 비롯한 동료 기자들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취재하고 기사를 작성하는 시간이 무의미하게 느껴졌고 심지어 어차피 읽는 사람도 없으니 대충 쓰고 말자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그러나 동료 기자들의 태도는 사뭇 달랐다. 그들은 본인들의 기사를 읽는 독자가 몇 명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전혀 개의치 않는 듯 기사 작성의 모든 과정에서
몇 번의 편집을 거쳐도 글은 완벽하지 못하다. 학보사 입사 전까지 글에 대한 자신이 있었다. 느낌대로 쓰는 것이 필자의 글쓰기 방식이었다. 학보사에서의 글쓰기 또한 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학보사의 보도기사와 기획기사를 비롯한 모든 글은 플로우 차트가 우선이다. 글의 논리구조를 철저히 계획하고 글을 쓴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플로우차트가 생소했고 작성하는 것이 어려웠다. 솔직히 플로우 차트를 왜 쓰나 싶었다.지난 661호에서 ‘펜끝에서’라는 코너를 맡았다. 다섯 개의 소재와 플로우차트가 버려졌다. 문제제기의 원인 분석 그리고
7개월의 학보사 기자 생활 동안 4번의 마감을 거쳤다. 11편의 기사를 쓰며 알게 된 필자의 문제는 추상적이고 과장된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사실을 전달하는 목적에 적합하지 않은 기사를 써냈다. 문학작품을 읽으며 보았던 감성적인 표현과 기교가 들어간 글을 멋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문장들이 퇴고 과정에서 사족과 군더더기로 평가됐다. 고심해서 쓴 글이 안 좋은 평가를 받자 마음이 아팠고 학보사라는 곳이 필자와 어울리지 않는 공간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동안 써왔던 글과 다른 익숙하지 않은 글쓰기였기에 올해 개강
논술 전형으로 대학에 입학해 글쓰기에 대한 나름의 자부심이 있었다. 새로운 글쓰기를 원했던 시기에 학보사 수습기자 모집공고를 보고 바로 지원서를 작성했다. 결국 3대 1의 경쟁률을 뚫으며 본보의 수습기자가 됐다. 수습기자 교육을 한 달가량 받고 나서야 본격적인 기사 작성에 투입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신문에서의 글쓰기는 유달리 어렵게 느껴졌고 수없이 고민해야 했다.그 이유는 필자가 글을 써오던 방식에 있다. 필자는 주장을 드러내는 글쓰기에 익숙했고 사실을 전달하는 글쓰기 경험은 현저히 부족했다. 글로써 주장을 드러낼 때 이미 필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