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불편러’라는 말이 있다. 과도하게 불편함을 제기하는 이들을 칭하는 단어다. 필자는 불편함을 불편해하는 사람이었다. 사회 문제나 현상에 대해 비판하는 것이 융통성 없게 느껴졌고 갑론을박을 첨예하게 다투는 이들에게 공감하기 어려웠다. 뉴스나 신문 속 집요하게 사회 문제를 파헤치는 기자는 내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새로운 일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으로 학보사에 지원했고 수습기자 활동을 시작했다. 막상 시작한 기자 일은 나와 맞지 않았다. 소재 회의에서 교내 날벌레 떼 문제나 교내 계단 보수 문제를 보도 안건으로 건의하는 동료 기자들을 보며 이렇게 사소한 일들이 보도할 만큼 중요한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인터뷰에 방어적 태도를 취하는 관계자들을 보며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것은 아닌지 움츠려들기도 했다. 필자의 날 선 걱정과는 달리 설문 조사에서 학우들은 날벌레로 인해 고충을 적극적으로 토로했다. 또한 필자가 직접 이용해본 계단들은 너무 어둡거나 부식으로 인한 사고의 위험이 다분했다. 학보 발행 이후 계단 보수 공사가 진행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나의 편협한 생각이 바뀌었다.

학우들에게 불합리한 사안을 전하기 위한 취재는 부담스러웠다. 좋은 소식은 보도해야 마땅하지만 나쁜 소식을 다루는 건 어려운 일이라 느꼈다. 원인이나 책임소재가 명확한 사건의 책임자를 문책하는 것이 두려웠고 명확하지 않은 사건이면 혹시 무고한 이에게 책임을 묻게 될까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직접 취재하고 몸소 체험하니 불편과 불합리는 직접 마주하지 않으면 해결되지 못한 채 커지는 것이었다.

기자로서 문제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는 세상을 좋은 쪽으로 변화시킬 순 없다.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분쟁의 원인이 아니라 해결의 시발점이다. 프로 불편러를 불편해했던 필자는 학보사를 통해 불편함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을 수 있었다. 누군가의 불편함을 예민하게 반응하고 제기하는 것은 불편한 세상을 바꿀 첫걸음이다. 학보사가 내딛는 이 걸음들에 보탬이 되는 기자가 되고 싶다.

 

저작권자 © 아주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