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부터 글로 표현하는 것을 좋아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을 글 속에서는 필자가 원하는 아름다운 언어들로 가득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본보에 들어온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글을 쓰는 공간에 들어가 다양한 사람들과 대화하며 외로운 독자에게 위로가 되어주는 따뜻한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러나 신문의 글은 내가 생각한 글과 달랐고 본보의 글은 형식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이에 따라 주관을 담기 힘들었고 가독성과 중립성을 지키고자 적었던 글을 수정하기 다급했다. 필자의 생각과 이야기를 글로 녹여내는 행복은 점차 흐려져 갔다. 그렇게 본보에서 발을 빼려 하는 순간 676호 ‘서로의 인생을 빛내줄 수 있는 법’을 만났다. 보도 기사와는 달리 글 속에 주관을 담을 수 있어 행복했고 떠오르는 생각에 대해 기자들과 대화하는 과정은 무엇보다 재미있었고 의미 있었다. 3주 동안 이에 대한 생각을 하루도 멈출 수 없을 정도로 글과 책에 푹 빠진 채 더 완벽한 글을 쓰고자 고민했다. 같은 책을 반복해 읽을수록 더 많은 생각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책 짚고 역시 ‘기사’였다. 기사가 되기 위해선 필자의 생각을 코너에 맞는 논리로 만들어야 했다. 그 과정에서 필자의 표현과 생각을 굽혀야 했고 틀에 맞춰 써야 했다. 결국 수정의 과정이 거듭될수록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조차 흐릿해져 버렸다. 신문에 부합하게 써진 가독성이 높고 깔끔해진 기사가 아직까지 필자에게는 불만족스럽기도 한 이유다.
                                                                                                                       누군가가 기자 일기를 본다면 왜 지금까지 학보에 남아있었냐고 물을 것이다. 우스갯소리지만 오기 때문이었다. 필자의 명함을 흔들며 ‘유지민 수습기자’라 놀리던 친구의 말에 반드시 정기자를 달고 나오겠다 다짐했다. 당시는 막막했으나 되돌아보면 헛된 걱정이었다. 반복되는 과정과 시간으로 만들어진 11개의 기사 또한 모두 소중한 나의 글이었고 본보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절대로 쓰지 않았을 글이기에 필자가 좋아하는 글이 무엇인지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비록 원하는 글을 쓰진 못했지만 긴 시간 동안 좋은 사람들과 함께한 시간이 있었기에 스스로가 성장했다고 믿는다. 이제 기사의 ‘필자’에서 벗어나 온전히 ‘나’의 글을 쓰고자 본보에서의 시간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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