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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따라 흐르는 곳, 청계천
  • 김한글 기자
  • 승인 2016.11.16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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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5일. ‘최순실 게이트’와 관련한 집회가 열렸다. 15만명의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청계광장과 광화문으로 모였다. 그날 청계천 하류부터 청계광장까지 두시간 가량을 걸었다.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큰 시위 전에 감도는 긴장감 같은 것은 없었다. 웃음이 있었고, 여유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문득 청계천과 사람이 참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계천은 우리와 닮아간다

▲ 과거 판자촌이 형성됐던 청계천의 모습

청계천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었다. 때로는 아낙네들의 빨래터로, 아이들의 놀이터로 그리고 빈민들의 집터로 자리해온 청계천은 조선 세종 때 생활하천으로 규정된 이래로 서울의 궂은일을 도맡으며 수백년간 사회의 모습과 함께 변화해왔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당시의 사람과 사회와 그 모습이 꽤나 유사하다.

일제강점기 시기. 피폐한 삶을 겪던 수많은 빈민들은 청계천에 정착해 빈민촌을 형성했다. 당시 하천정비작업이 시작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당시 일제시대의 행정조치는 단순히 조선총독부와 같은 식민지 기관 이전을 목적으로 진행된 것이었으므로 청계천의 복원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이기도 했다. 서울을 가로지르며 본디 북촌과 남촌을 나누던 경계였던 청계천은 이 기간동안 조선인들이 거주하는 종로와 일본인들이 사는 혼마찌를 나누는 경계가 됐다. 조선에 대한 차별과 억압의 경계선으로 민족의 슬픔을 함께하게 된 것이다.

그런 청개천은 광복 이후, 1958년 대대적인 복개작업에 들어갔다. 수백년을 흐르던 청계천은 너무나 간단히 콘크리트로 덮여졌다. 흐르는 하천을 콘크리트로 덮는 것은 자연환경 보다 개발에 더 집중하던 모습을 여실히 드러낸다. 당시 ‘불도저’로 불렸던 서울시장은 오랜기간 사람들의 곁에서 흐르던 청계천은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차가운 돌로 덮었다. 11km에 달하는 청계천이 사라지고 도로가, 고가도로가 생겨났다. 사람들 역시 좁은 공장 한켠에서 아침부터 밤까지 먼지와 함께 일했다.

<종일 먼지 구덩이 속에서 일하다 보면 콧구멍에 새까만 코딱지가 닥지닥지 엉겨 붙게 마련이다. 밤늦게 버스에서 코딱지를 파는 아가씨는 영락없이 청계천 피복공장 노동자라고 할 수 있다. 통행 금지에 임박해 일을 끝내면 막차를 놓치지 않으려고 부랴부랴 공장을 나서야 하는 탓으로 씻고 정리할 틈이 없어 더욱 그렇다>

<노동청 근로 감독관 - "주휴제는 일요일에 아무 때나 하루만 쉬어도 되는 것이지, 꼭 일요일마다 쉬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노조에서 나와 단전을 하는 것은 억지를 쓴 것입니다. 작업해도 좋으니 어서 작업하세요.">

- “밤 8시에 불꺼진 청계천 공장...천지개벽이었다” 오마이뉴스 14.11.2

본래 있어야 할 자리를 잃은 하천처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젊음을 공장의 부속품으로써 희생했다. 청계천을 중심으로 빼곡히 들어선 공장과 그 위로 건설된 고가도로는 한국의 발전을 상징함과 동시에 수많은 사람들 특히 여공, 노동자들의 인권 상실을 상징하기도 했다. 콘크리트 바닥을 흐르는 청계천 위의 평화광장에서 전태일이 분신했고, 제 2·3의 전태일들이 생겨났다. 사람이 사람보단 산업화의 부품으로 취급되던 당시의 아픔을 함께한 청계천이 다시 돌아온 시작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 지난 뒤, 시대가 변해 고가도로가 근대화와 산업화의 자랑이 아닌 개발에 대한 무지가 만들어낸 골치덩어리로 인식되고 나서였다.

청계천에서 피어난 우리, 민주주의

복원되고 난 후의 청계천은 사람들에게 또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시민들이 여가시간을 즐기기 위해 청계천을 찾았고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허전한 벽돌엔 벽화가 그려지고 다리 아래 공간들에서는 각종 문화행사들이 열렸다. 산업화와 독재의 강압 아래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시대를 콘크리트 아래에서 함께했던 청계천에선 민주주의 시대의 자유와 사람을 위한 문화가 피어났다.

사람들과 황조롱이를 비롯한 새들, 어류와 각종 곤충들이 돌아온 이곳엔 콘크리트가 덮었던 어두운 시절이 더는 없다. 하류에는 물억새가 보기 좋게 자라서 또 다른 즐거움을 만들었다. 예전 고가도로를 지탱하던 기둥들도 청계천을 구성하는 하나의 조형물일 뿐이다. 사람들이 청계천으로 다시 모이게 된 것은 어떻게 보면 삶의 터전으로써 사람과 함께 아픔의 시대를 함께 했던 모습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청계천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말 할 수 있는 시대를 함께하고 있다. 청계광장을 대표하는 촛불문화제가 바로 그것이다.

큰 시위가 있는 날이지만 청계천의 산책로는 웃음과 활기가 넘쳤다. 시위와 폭력 그리고 운동권의 연관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이미 옛말인 듯하다. 이날은 청계천 등불축제가 시작되는 날이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대통령 하야’와 같은 팻말을 들고 다녔지만 그들 역시 청계천의 풍경을 보며 즐기고 주변 사람과 웃고 떠드는 평범한 시민이었다.

▲ 오늘날 청계천은 시민들의 여유를 나누는 장소

지난날, 가녀린 여고생들이 청계광장으로 나와 촛불 문화제를 시작한 이래로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을 보여주기 위해 이곳으로 나와 촛불을 들었다. 이를 두고 누군가는 ‘민주주의의 꽃이 피었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청계천에서 시작된 이것은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다시 사람을 품은 청계천에서 사람은 당연하게도 민주주의 사회의 권리를 말하고 있다. 촛불과 함께 웃으며 평범한 삶 속에서 시민의 목소리를 낼 수 있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앞으로도 저마다 다른 사연을 가진 수많은 청소년들과 대학생 그리고 시민들이 이곳에 모일 것이다. 청계천과 함께 우리의 민주주의 역시 계속해서 흐르고, 피어날 수 있길 바란다.

김한글 기자  petterday@ajo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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