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을 부르지도 못한단 말인가.

지난 18일 5.18민주화운동 36주년을 맞아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기념식이 진행됐다. 하지만5.18민주화운동의 피해자들을 추모하고 5.18민주화운동 아픔을 공유해야 하는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기념식에서 8년 째 마음껏 임을 부를 수 없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1981년 5월에 민주화운동 중 희생된 윤상원과 노동운동가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을 위해 소설가 황석영이 작사하고 김종률이 작곡한 민중가요다. 김태승(사학) 교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은 5.18민주화운동을 겪으면서 광주시민들이 느낀 분노와 슬픔 그리고 한이 집약된 영혼결혼식에서 나온 노래다”며 “그 노래의 역사성에는 광주시민들의 정서가 잘 들어가 있다”고 말했다.

 국론분열을 조장하는 것은 누구인가.

83년도부터 08년도까지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제창이 됐었다. 그러나 09년도부턴 합창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 14일 국가보훈처에서 발표한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에 대한 보도자료에 따르면 ▲임을 위한 행진곡 노래 성격에 대한 찬반이 존재 ▲임을 위한 행진곡이 북한의 5.18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의 배경으로 사용 ▲기념일과 다른 제목의 노래라는 3가지의 이유를 들어 제창을 반대했다. 반면 5.18 기념재단에서 실시한 설문결과를 보면 약 82%의 사람들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공식 지정에 찬성했고 2013년 국회 본회의에서 ‘5.18 기념곡 지정 촉구 결의안’을 통과시켰지만 보훈처는 공식 기념곡 지정이 또다른 국론 분열을 만들 수 있다는 이유로 거부하고 있다. 기념식 진행을 담당하는 국가보훈처에선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합창하는 것 이외에는 마땅한 대안이 없다는 이유로 국민들의 소리를 묵살했다.

또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할 수 없다는 이유로 국가보훈처에서 제시한 근거에 따르면 이 곡은 합창조차도 해선 안 되는 노래일 것이다.

 

 

 

논란 아닌 논란 5·18민주화운동

5·18민주화운동의 논란

광주 5·18민주화운동은 우리나라 민주화에 한 획을 그은 사건이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광주 5·18민주화운동은 항상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시대마다 혹은 정권마다 이에 대한 해석은 차이가 있었으며 이러한 해석의 불규칙성은 사람들로 하여금 광주 민주화운동의 올바른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에 무리를 줬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제창·합창 논란’, ‘일간 베스트 이하 일베의 비하문제’ 등의 사회·정치적 이슈에서 광주 5·18민주화운동은 계속해서 거론돼왔다.

논란의 배경

이데올로기와 공포정치가 우리나라를 지배하던 시절 광주의 민주화 운동이 올바르게 평가되고 논의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70-80년대의 반공정책과 이를 통해서 일반 국민들의 자유권을 억압한 군사독재정권은 현재의 논란이 있게 한 원인이다. 사건 당시 정부기관 뿐만 아닌 민간언론에서도 광주 5·18민주화운동을 진행한 사실조차 은폐하기 급급했다. 실제로 광주에 관한 국내 언론의 보도는 3일이 지나선 1980년 5월 21일 보도됐다. 1980년 5월 21일 동아일보의 1면에는 ‘광주일원의 데모사태’라는 제목의 해당 사건에 대한 보도가 있지만 해당 기사 상에서는 사건의 발생만 언급할 뿐 배경이나 진행 상황 등을 제시하지 않은 채 해당 문제에 대한 정부의 대응계획만을 전하고 있다.

1980년 당시 전두환 군사정권은 비상계엄과 동시에 계엄포고 10호를 선포하여 사회운동가들을 불법적으로 감금하고 강제적으로 법을 집행했다. 이러한 것은 광주의 시민들에게도 적용되어졌다. 광주 민주화운동이 북한 특수부대, 간첩의 사주로 인한 시민들의 폭동이라는 근거아래 무고한 시민들을 고문하고 감금했다. 김 교수는 “당시 많은 광주 시민들이 반공이라는 이념아래 핍박을 당했으며 이러한 고초 이후에도 언론의 억압으로 인해 자신들이 경험한 일을 발설하지 못했다”며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전했다. 이념적인 문제는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일베 사이트에서도 광주 5·18민주화운동이 북한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으며 오히려 시민군이 계엄군을 폭행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1995년 7월 서울지검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민주화운동 당시 일반인 사망자는 166명이고 관군 사망자는 27명으로 계엄군이 시민군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상황이었다고 보기 어렵다.

현재 모든 헌법기관은 5·18 민주화운동이 민주화를 향한 시민들의 숭고한 희생이었으며 이에 대해 무고한 희생을 당한 시민들에게 국가적인 책임을 져야한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또 많은 역사학자들이 이 운동은 군사정권을 무너뜨리는 시발점이 됐으며 차후에 진행된 민주화운동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는 점을 언급했다. 실제로 광주 5·18민주화운동은 6·10 민주항쟁으로 계승됐고 차후 헌법에 부당한 정권에 대한 저항을 정당화하는 저항권이 명시되게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광주 민주화운동은 시민들 스스로 시민군을 조직하여 계엄군에 무장투쟁을 했다는 점과 투쟁과정의 5일 동안 자체적인 민정활동을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김 교수는 “광주 민주화운동과 관련이 깊은 임을 위한 행진곡의 경우에는 아직까지도 해외의 여러 민주화·사회적 운동에 귀감이 되고 있으며 이런 점에서 우리는 자긍심을 가져야한다”며 광주 정신이 단순한 논란거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5.18민주화운동의 정신을 기억하자.

 

▲ 출처:한겨레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난 8년 뒤 여소야대의 권력체제가 형성돼 5.18민주화운동의 진실을 밝힐 수 있는 밑바탕이 만들어졌다. 그 후 광주청문회가 실시되면서 5.18민주화운동을 왜곡하고 있던 것들이 속속히 파헤쳐지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계속된 진상규명 운동이 진행되고 5.18진상규명 위원회가 1994년 전두환, 노태우 등을 고발했다. 결국 15년이 지난 1995년 말 ‘5.18특별법’이 제정됐고 그 후 고 김영삼 전 대통령시절 5.18민주화운동은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 5.18민주화운동의 피해자들은 5.18민주 유공자라는 이름으로 국가유공자로 등록이 가능했다. 이러한 과정을 겪고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차마 말할 수 없었던 광주의 아픔은 국민들에게 전달됐고 아픔을 공유할 수 있게 됐다. 이렇게 법적으로 그리고 공식적으로 5.18민주화운동이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25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났음에도 아직 광주의 아픔은 완치되지 않은 상태다. 앞에서 말한 대로 아직까지도 5.18민주화운동을 둘러싼 논란들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에서 지정한 기념일이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5.18민주화운동을 여타 다른 민주화운동과 비슷하게 받아들이고는 있지만 유독 5.18민주화운동만 매년 극우주의자들로 인해서 잡음이 이어지고 있다. 또한 지역주의라는 그늘아래 5.18민주화운동에 의미에 대한 왜곡은 심해지고 있다. 오죽하면 5.18민주화운동 역사왜곡 방지를 위한 법안이 국회에 발의가 된 적이 있을 정도인가. 왜곡을 방지하기 위해 법안이 통과되고 있는 상황 자체가 한편으론 웃긴 상황이다.

5.18민주화운동 당시에도 국가안전기획부(과거 안기부) 국군기무사령부(과거 보안사) 등의 기관이 있었다. 그 때도 북한군개입이 있었다는 것은 논란이 제기됐지만 결국 확실히 사실관계를 파악하지 못했다. 이것이 계속해서 논란이 되자 진상규명을 위한 국가차원에서 노력이 이뤄져 논란은 종결됐다. 또한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기록들은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전 세계가 인정한 상황이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그것도 우리나라 내부에서 5.18민주화운동을 왜곡하는 움직임이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국가가 지정한 기념일에 대해서 국가보훈처가 국론분열을 일으켜선 안 된다고 말했지만 결국국가보훈처의 행동이 또다른 국론분열을 만들어냈다. 미디어 상에서나 그리고 민주화운동의 피해자들과 정부사이의 분열을 낳은 결과가 돼버린 것이다. 정부가 나서서 피해자들의 한을 풀어주라는 것은 아니다. 피해를 입힌 자들이 진정성 있는 사과가 필요하다는 것이고 광주의 정신이 오늘날의 우리가 누리는 민주화의 발판이 됐기 때문에 그 정신을 인정하고 아픔을 같이 위로하자는 것이다. 그것이 민주화를 누리고 있는 우리가 해야 할 최선의 도리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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