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유도를 바라보며 1

 우리의 배는 파도를 뚫지 못했다.

나와 선유도 사이에서

파도는 키를 높이 세우고

두 팔을 벌려 가로막았다.

仙遊島,

신선이 노니는 섬에

슬그머니 끼어들어 보려 했던

부끄러움이 

부슬비처럼 내렸다.

- 문효치

 

 

새벽 다섯시. 군산으로 향하는 버스편에 몸을 실었다. 선유도를 찾기 위함이었다. 시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지만 우연한 기회에 ‘선유도를 바라보며’라는 시를 접할 수 있었다. 무엇이 그 섬에 ‘신선이 노닐다 간 곳’이라는 이름을 가져다 줄 수 있었을까. 직접 찾아가 볼 기회가 당췌 생기지 않아 매번 미뤄만 오던 터에 이번 여행사업을 통해 이금택(기계·4) 학우와 이진호(기계·4) 학우와 함께 떠날 수 있었다. 나로서는 전부터 한번 들러보고 싶은 곳이었으니 감사할 따름이었다.

 

선유도는 무녀도, 신시도 등과 함께 고군산(古群山) 군도로 불린다. 과거 군산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가 이후 군산의 이름이 옮겨가면서 옛 고(古)자를 사용해 현재 이름을 가지게 됐다고 한다. 군산항 여객터미널에서 정기 여객선으로 2시간 가량을 나아가다 보면 어느새 이 이곳에 도착한다. 문효치 시인이 선유도에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부끄러움을 느낀 까닭을 내가 알 턱이 없으나 선유도까지 가는 길에서 나는 그 시인을 막았던 파도를 만났고 그가 보았던 선유도를 바라볼 수 있었다.

 

그는 평생을 백제라는 화두를 통해 시를 써온 사람이라고 한다. 신라라는 승리한 부족의 역사가 아닌 패배로 이뤄진 백제의 역사를 담아 오는 삶을 보낸 그에게 선유(仙遊)는 신선이 놀고간 지역이 아니라 백제의 영토임에도 백제인들의 패배의 역사를 잊은 듯한 이름을 가진 까닭일지 모른다. 다만 나는 다른 것에서 부끄러움에 공감을 할 수 있었는데 그 첫번째는 조용했던 선유도에 발을 딛는 수많은 인파 속에서 느꼈던 것이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가장 먼저 볼 수 있었던 것은 저 멀리 보이는 망주봉이였고 항구 주변을 나는 갈매기들이었다. 어선은 하늘에 떠있는 해와 함께 천천히 갈길을 가고 있었고 저 멀리 항구에 묶여있는 작은 배들이 보일 뿐이었다. 아마 신선이 정말 노닐었다면 선유도에서의 조용함과 여유로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 크지 않았던 섬이기에 1박 2일간 선유도의 모든 지역을 걸어 다니기로 결정했다. 점심 때가 다돼서 도착해 허기가 지기도 했기에 가까운 식당에 들러 간단히 요기를 하고 선유도를 걷기 시작했다. 

 

처음 눈을 사로잡았던 풍경들을 보게된 이후에 곧바로 볼 수 있었던 것은 손님을 모셔가기 위한 숙박업소들의 몸부림이었다. 수많은 픽업 차량이 먼지를 일으키며 쉬지않고 돌아다니고 섬의 상당부분은 그 때문인지 도로를 확장하기 위한 공사가 진행중이었다. 신선들이 노닐던 곳이라고 불릴만큼 아름다움이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들어오고 또 그것 때문에 자연히 발달하게된 상권일지 모르겠으나 내가 느꼈던 선유도에서의 부조화(不調和)는 그곳에 있던 많은 사람들 역시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언제부턴지 모르게 언제나 그곳에서 있었던 섬에게 선유도라는 이름을 준 것도, 그리고 이제와서는 그 이름에 어색함을 느끼게 만드는 것도 역시 우리라는 것이 내가 느낀 부끄러움이었다. 신선이 노닐던 곳에 슬쩍 끼어보려 했던 우리의 모습은 문 시인이 얘기하려 했던 그것이 아닐지라도 많은 부분에서 유사한 부분이 있다.

 

 

 
 

 

신선이 노닐던 옛 선유도를 그대로 느낄 수는 없었을지 몰라도 마치 다른 세상에 온 것처럼 선유도가 주는 선유도만의 느낌이 존재했다. 차들이 다니지 못하는 곳에는 여전히 선유도만의 여유가 남아있고 삶이 남아 있었다. 5월 초, 늦은 봄의 선유도는 새로이 피어나는 꽃과 푸르름이 바다의 익숙함과 만나 태동하는 과정에 있었다. 

 

선착장에서 선유대교를 지나 서쪽으로 옥돌해수욕장을 향해 걸었다. 바다를 끼고 걸을 수 있는 산책로를 따라 십여분 정도 걸어가자 맑고 청아한 소리가 들려왔다. 옥돌해변에는 모래 대신 옥돌이라 불리는 얇은 자갈이 수없이 많이 있는데 파도가 칠때마다 이 옥돌끼리 부딫히며 맑은 소리를 낸다. 지역 주민들은 이것을 ‘자갈이 노래한다’고 표현하고는 한다. 비가오나 눈이오나 파도가 있는 동안은 항상 들려오는 노래소리기 때문에 지나다니는 어선에는 따듯함을, 잠 못드는 밤에는 자장가로,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에게는 추억으로 매번 다른 의미를 지닌다.

 

옥돌해변을 지나 선유봉으로 계속해서 올라갔다. 선유도라는 이름의 유래는 이곳 선유봉에서 부터 시작했다는 설이 있다. 선유봉 꼭대기의 형태가 마치 신선들이 바둑을 두는 것과 같이 보인다 하여 선유도라고 부르게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행이 끝난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굳이 선유봉에서의 모습이 아니더라도 선유도라고 불렸을 것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문 시인이 말한 부끄러움의 또다른 이유는 내가 느낀 또다른 부끄러움과 같은 것일지 모른다. 선유도에서 만난 편안함과 안락함은 그동안의 삶에서 쉬이 느끼지 못하던 것이어서 온전히 그 여유를 소유하지 못한채 느끼는 이질감 때문에. 선유도의 일부로 섞일 수 없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일종의 푸념이지는 않은지.

 

곧장 장자도와 대장도를 향해 걸었다. 쉬지 않고 걸었던 이유는 1박 2일간의 짧은 일정동안 그곳의 모든것을 눈에 담고 싶어서 였다. 섬을 잇는 하나의 길을 따라 걷는 동안 여전히 사람들이 많았지만 처음 선착장에서 만큼은 아니었다. 연휴의 끝자락에 선유도를 밟은 만큼 많은 사람들이 점차 이곳을 떠나 다시 삶으로 돌아가고 있는 터였다.

 

길을 걷는 동안 덥고 땀이 흘러 겉옷을 벗었지만 아직까지 부는 바닷바람이 따듯하지 않아 다시 입고 벗고를 반복해야만 했다. 대장도와 장자도는 예로부터 고군산(古群山)군도의 주민들이 대피항으로 이용하던 곳이었다. 동쪽으로는 선유도가 서쪽으로는 관리도가 감싸 안고 있어 바람과 파도를 막아주고 있는 것이다. 큰 태풍이나 폭풍을 만날때면 이곳으로 피신해 재해가 지나가길 기다리고는 했다고 한다. 그래선지 바다 한 가운데서 작게 솓은 장자도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집들은 안정감있고 평화로워 보였다. 

 

어느덧 저녁이 다되어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숙소는 망주봉 즈음에 있어 돌아가는데 한참을 더 걸어야 했다. 숙소로 가는 길에는 명사십리(明沙十里) 해수욕장을 지나야 했다. 예전 사람들은 고운 모래를 명사(明沙)로 불렀다고 하는데 아마 이곳의 모래를 명사로 부른 것은 해가 질 때나 떠오를 때 햇빛에 모래가 밝게 빛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빛나는 모래가 십리에 걸쳐 있으니 그때에 멀리서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을 은 과연 신선이 걷던 길을 걸었다고 해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해가 꽤나 길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선유도에서 시간은 그 어느때보다 빨리 지나갔다. 

 

  

 

 선유도를 바라보며 2

 

  

 

머나먼 섬에도

 

봄은 오고 있는가.

 

파도의 주름 속에

 

숨어 있던 푸른 달빛들이

 

저 섬을 깨워 색칠하고

 

조류에 녹아 표류하던

 

오랜 시간들이 발라진 해풍은

 

섬으로 섬으로 모여드니

 

저 바다에도 봄은 오고 있는가.

 

- 문효치

 

 

 
 

 

이번 여행을 위해 군산에 도착해 택시를 탔을 때 기사님과 짧은 대화를 나눴던 적이 있다. 그분의 말에 따르면 군산은 아픔의 도시란다. 일제 강점기 당시 한국인들은 시내 중심에서 살지 못하고 산 구석으로, 도시의 가장자리로 쫒겨나 살았다. 그 와중에 선유도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웠을 것이다. 문득 선유도가 관광지로 알려진 것이 군산에 사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무릉도원처럼 생각되어 왔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선유도에 이번 해의 봄이 왔고 이젠 봄을 지나 여름이 오고 있다. 관광 사업은 전에 없이 활성화되고 있지만 이것이 선유도의 봄을 의미하진 않는 것 같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섬을 찾으면서 이곳 선유도에도 많은 바람이 불고 있다. 작은 섬을 걸으며 여유와 지난 시간을 느낄 수 있었던 도로 주변은 이제 더 넓은 도로를 놓기 위해 파괴되고 있는 실정이다. 주변 산을 깎고 보형물을 설치하고 또 그 사이를 누비는 숙박업소 직원들의 차량이 일으키는 모래먼지는 선유도가 계속해서 유지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만들었다. 

 

오랜 시간동안 선유도에서 섬만의 방식으로 쌓여온 생활 모습과 전통은 이제 외부에서 들어오는, 신선들에게 끼고 싶은 사람들에 의해 점차 파괴되고 있는 것 같다. 과거 염전에 종사하고 어업에 종사하며 생업을 잇던 사람들은 더 이상 어업이 아니라 숙박업으로 삶의 터전을 이전했다. 또한 바다 한가운데서 맞는 바닷바람에 멋들어지게 깎여나간 바위들 사이사이 기둥을 세우기위해 발려진 시멘트들과 곳곳에 버려져있는 쓰레기들은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시사한다. 

 

문 시인이 해풍(海風)이라고 표현한, 섬에 모여드는 시간들은 선유도만의 문화이자 풍경이고 또 삶이었을 것이다. 16년 늦은 봄에 찾은 선유도에서 나는 신선의 발자취를 찾았지만 그것이 언제까지 섬에 모여있을 것인지는 알 수 없을 일이다. 관광, 개발과 같은 선유도에 부는 해풍 뿐만아니라 한반도에서 부터 역으로 불어나가는 해풍(害風) 역시 섬으로, 섬으로 모여든다. 선유도에서 신선의 발자취는 찾을 수 있으나 더 이상 신선은 찾을 수 없다. 예전에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 나중에는 선유도에서 신선의 발자취가 아니라, 지금 있는 여유와 아름다움의 발자취만을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아니, 예전에 아름다움이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기심에 기인한 해풍(害風)이 계속해서 쌓이면, 더 이상 발자취마저 찾을 수 없을지 모를일이다. 고군산(古群山)에서 군산(群山)으로 나오는 배에 올라 선유도를 다시한번 바라봤다. 이번에 봤던 선유도의 모습이 마지막이 아니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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