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눈을 감고 나지막이 읊조리는 아름다운 단어들의 연결. 테오도르는 자신이 가진 글 솜씨를 펼치는 대필가로서 사람들의 메시지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따뜻한 마음으로 노인의 입장에서 배우자에 대한 한 편의 시를 써내려가는 장면을 만약 플라톤이 봤다면 그를 세상 밖으로 쫓아내려 했을 것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플라톤은 누구보다도 관념과 본질을 뜻하는 이데아를 중시했었고 현실을 이데아에서 파생된 그림자라고 인식했다. 그리고 현실에서 한 번 더 파생된 또 다른 그림자인 감정 표현의 예술들은 본질을 인식함에 혼란만을 줄 뿐이라고 단언했다. 그렇다면 플라톤은 테오도르의 사랑에 관해서는 어떤 대답을 할까?

테오도르는 평생을 함께 지내오던 인생의 동반자였던 캐서린과 이혼한 후 공허감에 빠져 살다 사만다라는 여자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성숙한 여성의 목소리를 지닌 사만다라는 이름의 인공지능 OS(Operating System)와 사랑에 빠진다. 머신 러닝의 일환으로 사만다는 테오도르와 이야기하면서 그를 기반으로 성장하게 되며 당연한 수순으로 서로에게 호감이 생기게 됐다. 그러나 이에 대해 플라톤은 육체가 없는 OS에 대한 그의 사랑은 허구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에 배척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릴 것이다. 정말 그 사랑마저 허구인 것 일까?

▲ 영화 Her의 한 장면
▲ 영화 Her의 한 장면

그녀는 목소리만 존재하는 허상이다. 그러나 실존하지 않는 OS는 캐서린보다 더 테오도르에 잘 맞게 발전했고 서로는 친구 이상의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실재하지 않지만 실재함을 대체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그런 허상을 사랑하게 되는 행위 자체는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처럼 때로는 존재하는 것보다 더 생생하게 인식되는’ ‘시뮬라시옹’이며 그 결과물로써 파생되는 더 인간스러운 허상인 사만다는 ‘시뮬라크르’가 된다. 즉 시뮬라크르는 허상의 대체물이 된다. 그러나 이혼서류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캐서린에게 ‘마음정리 하나 하지 못하고 OS에게 위로나 받고 있다’는 비난을 받고서 그는 자기반성을 통해 그의 시뮬라크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OS를 처음 접하게 되었을 때 반갑게 테오도르를 맞이하는 사만다에 비해 인공지능이라는 처음 겪는 상황에 당황해 머뭇거리던 그는 이내 놀라워하다 그녀가 생각보다 자신과 말이 잘 통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로써 그는 외로움을 위로 받고 닫혀있던 마음을 점차 열고 웃음을 되찾는다. 인공지능이기에 테오도르에 맞게 내면적 성숙을 이어가는 사만다 역시 사용자를 변화시켰다. 그들은 진심으로 공감했고 사랑했으며 서로를 변화시켰다. 비록 그들이 끝에서는 이별을 경험했지만 그 역시 끝없는 사랑의 연속이었다.

이제 우리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지금은 플라톤이 살았던 시대와 다르게 컴퓨터나 인터넷 매체등이 발달한 시대이다. 정의되거나 접할 수 없는 현실보다 더 쉬운 방법으로 우리는 매체라는 허상에 의해 허상을 이데아로 받아들인다. 이렇게 이데아가 중요할 수 없는 특이한 시대에서 

시뮬라시옹에 의해 형성된 시뮬라크르가 현실을 정의하고 있다. 그 시대 속에서 인공지능이 허구라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아래 테오도르는 끝내 사랑하는 방법을 깨달았다. 소유하는 대상이 아닌 서로 공감하는 대상으로 느끼는 사랑은 캐서린에게서 얻을 수 없었던 새로운 방법이었다. 테오도르의 사만다에 대한 감정마저 시뮬라크르인가? 인공지능이었던 사만다의 테오도르에 대한 감정은 두말할 필요 없이 시뮬라크르 인가?

우리는 영화 ‘그녀’를 보며 외로움이라는 아픔 마음을 위로받는다. 이는 이데아나 현실로써 우리가 접한 마음의 변화가 아니다. 이미 영화 그 자체로 시뮬라크르인 ‘그녀’에 의해 우리의 마음은 위로받게 된 것이다. 허상의 허상에 의해 우리도 정서의 공감을 겪었다면 우리보다 한 단계 전의 그림자인 사만다와 테오도르 역시 의심의 여지가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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