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8일 조선일보에 간장 두 종지라는 칼럼이 실렸다. 밥을 먹으러 중국집에 갔다가 탕수육에 달랑 간장 두 종지가 나왔단다. 사람은 넷인데 간장이 두 종지가 나오는 것이 아니꼬워서 그날 조선일보의 주말뉴스부장은 다시는 그 중국집을 가지 않겠다는 칼럼을 작성했다. “배급사회와 아우슈비츠에 있는 것도 아닌데 간장이 두 종지냐”며 “쿠팡이나 위메프에서 간장을 한박스 주문하고 싶다”고 말장난하고 살짝 얹어 주는 말이 가관이다. ‘어떤 경우에는 을이 갑을 만든다’

그는 식당에서 설렁탕을 가져다주는 종업원에게 ‘감사하다’고 말하는 것을 ‘이상한’ 사회라고 말한다. 그런 말 한마디가 자존심이라도 상하는 것인가. 사실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를 건내는 것을 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더군다나 그것을 종업원의 ‘갑질’이라 말하는 사람은 더더욱 없다. 우리에게 인사를 강요한 것도 아니거니와 고맙다는 말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격려고 예의일 뿐이기 때문이다,

마음 놓고 힘을 휘두를 수 있는 사람과 가만히 당하고만 있어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두 사람의 갑을 관계는 명확하다. 단지 중국집에서 먹은 만큼의 값을 지불했다고 해서 음식점 주인과 손님의 상하 관계가 성립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번 칼럼의 경우는 갑과 을의 관계가 명확히 성립됐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언론사의 펜을 들고 있는 주말 뉴스부장과 중국집에서 간장을 나르는 사장의 얘기라면.

그는 칼럼의 끄트머리에서 조선일보 주변 중국집 중 “‘중화’ ‘동영관’ ‘루이’는 아니다”고 밝히며 사실상 간장 종지를 주지 않은 중국집을 밝히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언론인 조선일보의 주말뉴스부장은 자신이 가진 지위를 이용하는 방법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는 그만의 졸렬하고 강력한 방법으로 을이 갑을 만드는 상황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다. ‘을이 갑을 만드는 어떤 경우’가 그에게 있어서는 간장 네 종지가 아닌 두 종지를 주는 중국집인 것이다.

그의 생각에 동의할 수 있는 갑의 위치에 서는 사람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될 수 있을까. 언론인이라는 의미를 그는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가 중국집에서 찾은 것은 갑과 을에 대한 통찰이 아닌 간장 두 종지가 그에게 준 불쾌감일 뿐이다. 몸에 벤 습관은 생각으로 나타난다. 을의 갑질을 비판하고자 했던 그는 어째선지 간장 두 종지가 그에게 주는 모욕감을 견딜 수 없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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