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다음 해 연구개발비(이하 R&D) 예산을 약 16% 축소했다. 책정한 예산은 21조 5천억 원으로 올해보다 3조 4천억 원 감소한 금액이다. R&D 예산이 삭감된 것은 지난 1991년 이후 33년 만에 처음이다.

갑작스러운 R&D 예산의 삭감에 과학계는 입을 모아 반발하고 있다. R&D 예산 삭감은 단순히 국내에 국한한 문제가 아닌 국제 경쟁력 상실의 문제다. 안 그래도 열악한 연구 환경 속에서 예산을 삭감하는 것은 결국 연구환경과 연구 몰입에 악영향을 미친다. 국내 인재들의 국외 유출과 R&D의 질적 하락을 우려할 수밖에 없다.

전문가 집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은 자신만의 이념에 사로잡혀 잘못된 정책 행보를 보이고 있다. 대통령은 지난 6월 28일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나눠먹기식과 갈라먹기식 R&D는 제로베이스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소위 ‘이권 카르텔 혁파’라는 이념이 R&D 분야로까지 퍼진 것이다. 심지어 대통령의 이념에 휩쓸린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하위 20% 성과의 R&D 사업에는 구조조정 및 예산 삭감을 추진하는 성과 우선주의적 정책을 내놓기도 했다. 중심을 잡고 있어야 할 주무 부처마저도 대통령의 이념에 따라 흔들리는 상황이다.

현대 사회에서 R&D는 국가 경제의 기반이다. 세계 각국은 그 주도권을 확보하고자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제조업과 수출이 중심인 우리나라의 산업 구조상 R&D는 더욱이 중요하다. 원자재를 가공해 수출하는 과정에서 다른 국가와의 과학기술 경쟁이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과학기술의 지속적인 발전이 필요한데 이를 R&D가 뒷받침해야 한다.

대통령이 진정 R&D 분야의 이권 카르텔을 혁파하고자 했다면 예산 삭감이라는 방식을 택해서는 안 됐다. 예산 삭감은 외려 월평균 1백만 원도 받지 못하는 석·박사 학생 연구원들의 생계를 위협하는 칼날이 된다. 진정한 의미의 카르텔 혁파를 위해서는 대통령의 전문 분야인 수사를 통해서 부정한 사람들을 솎아냈어야 했다.

예산 삭감이라는 칼날은 국민의 삶을 위협하는 것은 물론이고 기초과학을 등한시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성과 중심의 정책 운용은 장기간의 연구를 요하는 기초과학 연구를 위축한다. 과학기술의 뿌리와 같은 기초과학이 등한시되면 융합과학 중심의 국가 경제가 흔들리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마치 2019년 일본의 수출규제로 반도체의 기초 부품 수급이 어려워지자 한국 반도체 업계가 크게 흔들렸듯 말이다.

대통령은 국가 경제의 책임자다. 대통령이 집중해야 할 것은 자신의 이념이 옳다는 것을 중명하는 게 아닌 국가 경제의 발전이다. 줄곧 과학기술과 국가 경제의 중요성을 외치던 대통령의 언행과 상반되는 이번 정책 행보는 이해하기 어렵다. 대통령의 시선이 이념에 꽂혀있는 작금의 상황이 지속된다면 앞으로 국가 경제의 발전을 위한 논의보다는 불필요한 이념적 논쟁이 반복될 것이다. 부디 대통령이 자신만의 세상에서 벗어나 R&D 예산 삭감의 재고를 바란다.

저작권자 © 아주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