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학교가 개교 50주년을 맞았고 우리 학보도 49돌 생일을 맞았다. 1년의 시차밖에 없으므로 아주대학교의 역사를 우리 「아주대학보」가 고스란히 지켜보았으리라는 짐작을 쉬 할 수 있는데, 이 짐작은 우리 학교 50년사를 쓰는 데 우리 학보가 큰 역할을 했다는 후문으로 확신이 된다. 그렇다. 우리 학보가 우리 학교의 역사를 증언하는 사초(史草)가 됐으며 우리 학보사 기자들은 사관(史官)의 역할에 빈틈이 없었던 것이다.

사관의 비유가 우리 학보사 기자의 역할을 단순한 관찰자의 그것으로 폄훼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모르나, 우리 역사 속의 사관은 엄중함과 추상(秋霜)같음을 그 본질적 속성으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엄중과 추상을 한결같이 유지하기는 쉽지 않아서 우리 학보와 학보사에도 어려운 시기가 없지 않았고 그 어려움을 슬기롭게 극복해 오늘에 이르렀다. 이런 역사성에 민감한 독자가 얼마나 될지를 밝은 얼굴로 말하기는 어려우나,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보다는 앞으로다. 독자들께, 지금의 우리 「아주대학보」가 과거의 시행착오를 겪으며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유심히 살펴봐 주시는 한편으로 학보로서의 기능과 역할을 어느 정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지도 애정 어린 눈빛으로 지켜봐 주시기를 부탁드린다.

위기 아닌 때가 언제 있었으랴 싶지만 기성 언론의 위기는 그 극에 달한 느낌이 없지 않다. 서 있는 자리에 따른 제각각의 진단과 처방이 나부끼는 중에 언론인의 소명 의식이 들먹여지기도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소명 의식으로는 위기를 진정으로 타개할 수는 없다. 그 말 자체가 강요와 희생의 느낌을 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언론의 위기를 강 건너 불구경으로 대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위기일수록 직접 나설 수밖에 없다. 상황이 불만족스러우면 내가 직접 나서면 그만이다. 조금의 수고를 들이면 우리 모두가 언론인이 될 수 있는 시기를 우리는 살고 있다. SNS의 이용이 그 한 방법이겠지만 이미 학보를 이용할 수 있는 우리 학보 독자들, 즉 우리 학교 구성원들은 나라에 대해서든 학교에 대해서든 신상필벌(信賞必罰)의 정신으로 양심의 목소리를 우리 학보에 투고해 주시기를 바란다. 이것이 우리가 학보의 주인이 되는 지름길이다.

봄이 왔다가 가고 있다. 자신들이 곧 봄 자체인 우리 학생들은 해마다 선물로 주어지는 봄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지 모른다. 그러나 두보(杜甫)가 읊었듯이, 봄은 늘, 산이 푸르러 꽃 빛이 불붙는 듯하다. 우리 「아주대학보」 창간기념일도 이와 같았으면 한다. 해마다 5월이면 맞는 창간기념일이지만 우리는 그날을 늘 경탄하면서 즐길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푸름과 붉음이 서로를 돋보이게 하듯이 우리 학교의 건강은 구성원 상호 간의 격려와 고무 그리고 조언 속에 있음을 잊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우리 학보가 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글 │ 이상신 아주대학보 주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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