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다음 영화>
<출처=다음 영화>

 심장병에 걸린 목수 다니엘은 손을 머리 위로 올릴 수 있다는 이유로 질병 급여 대상자에서 제외된다. 요양보호사가 필요했던 현실의 경증 지체 장애 노인 조형섭 씨는 ‘걸을 수 있다’는 이유로 등급 신청을 거절당했다.

 일하지 말라는 의사의 권유에도 다니엘은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 구직활동을 해야 했다. 그러나 디지털 소외 계층인 다니엘에게 온라인 신청 절차는 낯설기만 하다. 굶어 죽기 전 항고 재판일을 확정해 달라는 다니엘의 요구에도 경찰은 그를 체포한다. 노동의 의무를 다해온 다니엘은 제도에 의해 점차 복지로부터 밀려난다. 석유풍로 공장에서 일하던 조 씨도 혼자 쓰레기 골방에서 3년간 굶주렸다. 사각지대와 높은 신청주의의 문턱 그리고 복지 시스템에서의 인력 부족까지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작금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부정수급의 가능성 아래 설계된 절차는 다니엘에게 불가능의 영역이다. 노동할 수 없는 몸이 된 다니엘에게 실업급여의 대가로 또 다른 노동을 강요하는 상황은 이질적이면서도 의아하다. 온전히 자기 힘으로 가족과 이웃을 돕던 다니엘은 자신의 질병을 ‘증명’하지 못한 순간 암적인 존재로 취급받는다. 복지의 절차는 수치심을 주고 복지에서 밀려나면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하게 된다. 5분 지각했다는 이유로 복지를 받지 못한 다니엘의 이웃 케이티는 도둑과 거지 그리고 매춘부로 전락한다. 자존을 도와야 할 의무가 있는 복지의 부적절한 절차는 오히려 그들의 자존을 바닥으로 끌어내린다.

 별별 이유를 들어 자존을 고려하지 않는 복지 절차와 달리 다니엘과 케이티는 아무 이유 없이 서로를 돕는다. 그들은 복지 절차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인간적인 존중을 한다. 이들의 이야기는 우리네 현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지난달 29일 부당한 해고에 모멸감을 견디지 못한 경비반장 A씨가 자살하자 경비원 74명 중 71명이 이에 항의하며 자진 사퇴서를 썼다. 굴종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그들은 고개를 빳빳이 들고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존재하고자 한다. 인간성을 잃지 않기 위한 몸부림은 연대의 형태로 나타난다. 하지만 연대의 결과는 승리로 이어지지 않았다. 사회로부터 이미 소외된 그들의 연대는 여전히 참혹하다.

 처절한 다니엘의 저항에 시민들은 박수를 보낸다. 연대는 복지절차를 상대로 승리하진 못했지만 덕분에 절차로부터 다니엘의 존재가 지워지지 않을 수 있었다. 최소한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자존심을 포기할 것인가? 복지를 포기하고 자존심을 지킬 것인가? 사회가 자신을 인간으로 취급할 생각이 없다는 걸 깨달은 순간에 결국 다니엘은 복지 대상자임을 ‘증명’하는 것을 포기했다. 대신 끝까지 자존심을 지킨 다니엘은 떳떳하게 가난한 죽음을 맞이했다. 하지만 그의 장례식장에서 케이티는 “우리에게 다니엘은 부자였어요 그는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을 줬죠”라고 말한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숭고한 정신은 그의 육체적 죽음을 넘어서 현재의 우리에게 연대의 손을 내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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