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스 형이 유명해 진 김에 그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소크라테스는 왜 글을 쓰지 않았을까. 플라톤의 저술 『파이드로스』에서 그는 문자가 사람들을 기억하는 데 무관심하게 만들고 스스로 기억을 떠올리는 노력도 하지 않게 만들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 지적으로 그가 글을 쓰지 않았던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실제로 책이 널리 보급되면서 암기력은 상당히 떨어졌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수백 편의 시를 외웠다고 하는데 지금 현대인들은 자주 노래방을 가지만 수백 편의 노래가사를 외우지는 못한다. 그러나 문자의 시대는 사람들에게 오래된 지식을 섭렵하고 그 지식을 토대로 더 진전된 지식을 쌓을 수 있도록 하였고, 자유와 개인주의적 삶을 선물하였다. 소크라테스로서는 예상할 수 없었던 세계였을 것이다. 그리고 문자의 시대는 가고 영상의 시대가 왔다. 레이 브래디베리가 1953년에 쓴 과학소설 『화씨 451도』는 책을 불태우는 직업을 가진 주인공을 내세워서 독서가 불법이 된 시대를 그려본다.

사람들은 하루 종일 벽을 가득 채운 텔레비전을 보면서 TV 속의 인물이 가족이라고 느끼며 나머지 벽들도 벽면 텔레비전으로 바꿀 날을 기다리고 있다. 벽면 텔레비전을 통해 하루 종일 흘러나오는 정보들은 통속적인 것뿐이고 사람들 사이에서 대화는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이런 예측은 영상으로 전달되는 지식과 그 지식을 토대로 한 사유를 상상할 수 없었던 문자의 시대의 사람으로서의 작가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작가는 과학소설이 흔히 사용하는 외삽extrapolation의 방법을 이용하여 디스토피아적인 미래를 보여주고 경계하려 한 것인지도 모른다. 외삽이란 관측된 값을 이용하여 관측할 수 없는 영역의 값을 추정하는 방법을 말한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팬데믹이 오기 전 한동안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이 널리 퍼져있었다. 로봇이나 인공지능을 통하여 실제와 가상이 통합되는 시스템이 구축되어서 일어나는 혁명이 대변화를 일으킬 것이라는 예상이었다.

3차 산업혁명의 시대에도 채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입장에서 비대면의 수업을 두 학기 째 하다 보니 4차 산업혁명이 가져다줄 미래에 대하여 비관이 되기도 한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어쩌면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백신이었고 지금 세계는 백신의 치명적인 부작용을 겪고 있다는 생각조차 들었다.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고 따라서 축적된 지식이나 예술작품을 익히고 감상하는 방법을 잊어가고 있으며, 초연결 초지능의 삶을 살면서 자유와 개인주의의 삶에 대한 향유는커녕 그런 삶에 대한 향수(鄕愁)조차도 옅어질 것이라는 레이 브래디베리의 예측에 공감이 된다. 그러나 영상의 시대에 깊은 발을 담그고 있는 젊은 세대는 다를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언어에 의하여, 또 이후의 사람들이 문자에 의하여 지식의 폭을 넓히고 사유의 깊이를 더하였듯이, 지금의 젊은 세대는 영상이나 초연결을 이용하여 깊은 사유를 하는 방식을 자신들도 모르게 익혀가는 중이리라.

여전히 4차 산업혁명에 의한 문명 전환의 구체적인 결과는 예측하기 어렵다. 그러나 정확한 외삽을 하기 위해서는 관측된 값이 풍부할 필요가 있으므로 전문지식을 갈고닦는 길만이 응용과 예측의 질을 높일 것이다. 하지만 무지(無知)가 사고의 기반이 된다는 말은 테스 형이 수천 년 동안 유행시킨 말이다. 자신이 아는 지식과 방법을 넘어서는 것이 진정한 혁명이라면 미래는 여전히 어둠 속에 놓여 있고 그 어둠 속을 헤매는 것이 미지의 미래를 뚫고 나가는 유일한 방법이다. 서로 격려하고 함께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한 요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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