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함초롬바탕체를 싫어한다. 어린 시절, 함초롬이라는 친구(?)가 나에게 했던 거짓말과 질투 어린 행동들이 떠올라서다. 이유가 아주 유치하게 느껴지겠지만, 그로 인한 영향은 더 유치하다. 예를 들면, 학생들에게 과제를 낼 때, 그 어떤 폰트도 좋으니(심지어 궁서체도 괜찮으니) 함초롬바탕체로 작성하는 것만은 안된다는 기준을 제시한다.

물론 동명의 한 인간에 대한 배신감이 고작 글씨체에 대한 화풀이로 발현된 이 시트콤 같은 결과에는 수많은 변수가 동반된다. 늘 텍스트를 읽고 써야 하는 직업의 영향이 가장 클 것이고, 어쩌면 함초롬바탕체가 원래 내 취향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겪은 경험 때문에, ‘함초롬’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부터, 이미 글씨의 생김새는 제고의 대상에서 제외된다. 이렇듯 누군가(또는 무언가)를 싫어하거나 좋아하거나 무덤덤 해하는 반응에는 개인의 생애사적 경험/무경험이 관여한다.

많은 설문조사에서 청년층에서 통일의식이 낮다, 통일에 관심이 없다는 결과가 보고된다. 이러한 결과를 자세히 뜯어보면, 청년들이 다른 세대에 비해 통일의 필요성에 덜 공감하고, 통일문제, 관련 이슈에 관심이 적은, 즉, 호불호가 아닌 ‘낮은 관심도’를 의미한다. 심지어 내가 청년들의 통일의식이 낮다는 결과보다, 더 충격을 받은 것은, 정작 청년들은 이러한 결과에도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내가 함초롬바탕체를 싫어하게 되었듯이, 청년들이 통일 문제에 무관심한 데에도 이유가 있다. 첫째, 역사로부터의 거리 때문이다. 청년들은 분단이 더 편하고 자연스럽다. 태어나보니 분단된 한반도인 데다가 한국전쟁 역시 책으로 배웠다. 직접 전쟁을 겪은 노년층이나, 이산가족의 아픔을 보고 자란 우리 부모님 세대와는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다. 둘째, 현대인 기본적으로 남에게 관심이 없다. 대학생들은 학점 관리에 스펙 쌓기에, 아르바이트, 연애까지 하느라 당장 내 눈앞에 닥친 일이 아니면 관심을 가지기가 어렵다.

그런데 과연 분단과 통일의 문제가 우리와 무관할까?

분단은 청년들이 경험하지 못한 사건이지만, 동시에 역사로서의 영향력을 가진다. 어느 날 입영통지서를 받아 든 남자들은, ‘내일 당장 통일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한다.

한 여대생은 자살한 외할아버지의 행적을 좇다가 그가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이었으며, 평생을 북한에 두고 온 가족들을 그리워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녀는 자신의 삶에 깊숙이 존재하는 분단의 아픔을 다큐멘터리로 만들었고, 그렇게 영화 <그 날>이 세상에 소개되었다.

내가 아는 어느 탈북민 여성은 어머니의 환갑잔치를 해주려고 중국에 삯벌이를 나왔다가 중국 남성과 강제 결혼을 했고, 1년 8개월 된 딸아이를 북에 두고 온 아픔 때문에 매일 울며 악몽에 시달리던 중국에서의 삶을 뒤로하고 남한으로 넘어왔다. 그분은 지금 아주대 가까이에 사는 우리의 이웃이다. 우리는 경험해보지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인생이 우리 사회 속에 공존하고 있다.

통일, 반대해도 괜찮다.

통일을 반대한다면(혹은 찬성한다면), 무관심은 비양심적이다.

적어도 우리를 둘러싼 분단된 한반도와 이것이 우리의 삶과 생각의 근원에 미치고 있는 영향에 대해 관심을 두고 사유하면서 반대할(혹은 찬성할) 분명한 이유를 찾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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