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조금 다른 모습의 사람들이 해방촌 골목과 이태원 일대를 가득 메웠다. 짙은 화장과 독특한 헤어스타일로 치장한 이들의 차림새는 다소 과장됬지만 강렬했다. 이들의 모습에 지나가던 행인들도 가던 길을 멈추고 행렬을 바라보았다. 그 행렬은 바로 올해 2회차를 맞은 ‘서울 드랙(Drag) 퍼레이드’였다.

필자는 드랙 퍼레이드의 드랙 쇼와 행진에 참여하기 위해 해방촌의 작은 술집 ‘Living room’(이하 리빙룸)을 찾았다. 갑작스레 더워진 날씨였음에도 불구하고 행사 시작 시간인 3시가 다가오자 다양한 사람들이 거리로 모이기 시작했다. 약간의 두려움과 설렘을 안고 무지개 색 깃발 뒤편 계단으로 걸어 내려갔다.

 

드랙, 솔직한 모습의 나를 소개하기

인터넷에 드랙을 검색하면 주로 ‘남장여자’ 혹은 ‘여장남자’의 메이크업 혹은 패션 스타일이 나온다. 그러나 이는 드랙이라는 개념의 단면적인 면에 불과하다. 드랙의 예시로서 인용되는 사진들의 대부분은 ‘드랙퀸(Drag queen)’의 모습이다. 드랙퀸은 남성이 여성으로 분장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자신의 취향에 따라 여성성이라는 이름하에 수많은 이미지로 표현된다. 이렇듯 드랙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다. 여성 또한 남성스러운 모습으로 분장하며 이를 ‘드랙킹’이라고 칭한다. 남성 여성 그리고 남성 혹은 여성으로 정의될 수 없는 정체성의 사람에게도 드랙은 허용된다. 어떤 성적 지향을 갖고 가졌는지조차 상관없다. 서울 드랙 퍼레이드를 주최한 히지 양(30) 씨는 “개인의 성적 정체성 혹은 성적 지향을 떠나 솔직하게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드랙의 진정한 의미다”라며 “의상과 공연 그리고 메이크업 등은 그 표현 수단이다”라고 설명했다.

처음 드랙 퍼레이드를 접할 때까지만 해도 드랙을 시도해본 적 없는 내가 퍼레이드에 함께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했다. 하지만 퍼레이드의 부스에 들어오고 나서 그런 걱정은 말끔히 사라졌다. 해방촌 리빙룸 안에는 드랙 퍼포머뿐만 아니라 일상과 다를 바 없는 옷을 입은 사람들도 함께였다. 좁은 공간 안에서 사람들은 마치 오래 전부터 알았던 사이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웃고 떠들고 있었다. 

리빙룸 지하에는 드랙 퍼레이드 기획단의 부스 행사가 진행 중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부스는 콘돔 부스였다. 한 남성분께서 사탕 같이 생긴 무언가를 건네셨다. 자세히 살펴보니 콘돔이었다. 막대기에 콘돔과 리본을 꽂아 사탕같이 디자인해 부스를 지나치는 사람들에게 무료로 나눠주는 것이었다. 조금은 당황스러웠지만 뒤편에 보이는 포스터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주로 남성과 여성의 성관계에서만 콘돔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사회적 통념과 달리 포스터는 남성 간의 성관계에서도 콘돔이 필요하다고 적혀 있었다. 부스의 직원분은 “게이 간의 성관계에서도 여러 성병을 예방하기 위해 콘돔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다음으로는 외국인 학교에서 온 학생들이 운영하는 부스였다. ‘외국인 학교의 퀴어와 엘라이들’이라는 이름으로 학생들은 귀걸이, 목걸이 등의 악세사리를 판매하고 있었다. 엘라이란 퀴어의 친구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편지함이 있었다. 어떤 편지를 쓰는지 궁금했다. 외국인 학교 속 퀴어 친구들을 위한 편지를 써달라는 글이었다. 막상 종이와 펜을 받고 쓰려하니 무슨 말로 시작해야 할지 몰라 한동안 가만히 앉아있었다. 결국 응원한다는 말만 반복한 채 종이를 접어 편지함에 넣었다.

다음 일정까지 시간이 비어 ‘서울 더하기 드랙’이라는 제목의 인터뷰집을 구매해 읽었다. 드랙 퍼레이드 조직위원회에서 직접 펴낸 이 인터뷰집에는 여러 드랙 아티스트들이 드랙을 하는 이유와 서울이라는 공간에 대한 생각이 자유롭게 서술돼 있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인터뷰이는  대한민국 인천에서 태어나 캘리포니아에서 자란 에리카 발렌시아가 씨의 인터뷰였다. 그녀는 여호와의 증인 집안에서 태어나 종교적으로 검열당하는 환경에서 성장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상처를 받은 그녀는 유학생 시절 성 소수자 커뮤니티와 드랙 문화 속에서 자신의 욕구를 표현하며 비로소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됐다고 말한다. 그녀는 지금 서울이라는 공간에서 새로운 관계를 쌓아가며 삶의 의미를 찾아가고 있다. 인터뷰집 속 개인의 삶과 그에 얽힌 사연은 달랐지만 스스로에 대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던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자유로워진 계기는 바로 드랙이었다.

 

 

This is me

자유롭게 돌아다니던 부스를 돌아다니던 와중 사회자가 마이크를 들었다. 드랙쇼의 시작을 알리는 목소리였다. 세 명의 드랙 아티스트들의 공연이 이어졌다. 아티스트들은 무대에 나와 노래에 맞춰 춤을 추거나 립싱크를 하며 자신의 춤을 관객 앞에 선보였다. 첫 번째 공연이 끝나자 공연장의 열기는 한껏 달아올랐다. 다음 공연은 기괴했다. 악마를 연상시키는 듯한 차림의 퍼포머가 무대로 나왔다. 누군가의 비명 섞인 효과음과 기괴한 음악에 공연을 보는 3분간 그저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 차례로 한 드랙킹 퍼포머가 무대로 걸어나왔다. 노래가 들렸다. 영화 <위대한 쇼맨>에 나오기도 했던 노래 바로 ‘This is me’였다.

잔잔한 도입부를 지나 ‘This is me’라는 가사와 함께 코러스가 울려 퍼지며 어딘가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나 자신을 지키며 살아가겠다는 노래가 축제의 분위기를 더했다. 이들의 취향과 삶이 리빙룸 밖을 나가서도 계속되길 바라는 마음에 함께 This is me를 외쳤다.

드랙쇼가 끝나고 행진을 위한 안내가 시작됐다. 행진은 해방촌과 이태원역 일대의 차도에서 진행될 예정이었다. 두 가지 사항이 중요하게 언급됐다. 사회자들은 경찰의 협조에 대한 감사와 혐오세력의 도발에 넘어가지 말 것을 당부했다. “그들이 우리에게 폭언과 폭력을 일삼는다고 해서 똑같이 대하면 안된다”는 말이 반복됐다. 지난해 8월 인천 퀴어문화축제에서 동성애를 반대하는 기독교 세력이 시위대를 향해 욕설을 일삼으며 충돌한 적이 있었다. 이로 인해 여러 성 소수자들이 신체적·정신적 피해를 입었으나 제대로 된 보상은 이뤄지지 않았다.

4시 50분. 행진의 시작 직전 사람들이 리빙룸 맞은편 골목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무지개색 깃발과 함께 사람들은 다 같이 줄을 맞춰 섰다. 이번 서울 드랙 퍼레이드의 조직을 맡은 알리 씨와 양 씨를 선두로 행진이 시작됐다. 영국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에서 공부를 한 알리(26) 씨는 한국말을 굉장히 유창하게 구사했다. 그의 소개로 사회자이자 드랙 퍼포머 그리고 이번 퀴어 퍼레이드를 주최한 양 씨와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양 씨는 ‘허리케인 김치’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아티스트였다. 게이로서 드랙을 즐기던 그는 “드랙을 단순한 유흥이 아닌 자아실현의 방식으로서 보다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자 이 행사를 기획했다”고 말했다. 처음 리빙룸에 입장했을 때 어색해하던 필자를 반겨주고 사진 촬영을 허가해준 알리 씨는 “작년에 처음 시작한 행사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와줘서 놀랐다”며 “앞으로도 모두가 그저 재밌게 즐길 수 있는 행사가 되고 싶다”고 소감을 밝혔다.

해방촌을 관광하는 외국인들이 행진에 참여하는 사람들과 함께 환호성을 지르고 호응해주는 모습이 신기했다. 그러나 점점 도심으로 행진이 계속될수록 이러한 환호성과 호응의 모습을 찾기는 힘들었다. 행진을 찍기 위해 인도로 올라가 행진을 촬영하던 중 몇몇 사람들은 “뭐야 저게” 혹은 “이상해”라는 말을 하며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행진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이를 가볍게 무시하듯 오히려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스티커를 나눠줬다. 때로는 악수를 때로는 포옹을 나눴다. 다행히 행진은 혐오세력과의 별다른 충돌 없이 잘 마무리됐다. 

행진이 끝나고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눴다. 애프터파티까지는 다소 시간이 남아 있었다. 사람들은 리빙룸 건물 옆 무지개 깃발 근처에 모여 서로 사진을 찍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필자 또한 그런 사람들의 대화에 끼어들고 싶어 눈치를 보던 참에 비슷한 연령대의 남성분들과 대화를 나누게 됐다. 이번 드랙 퍼레이드를 통해 처음 드랙을 접한 송경수(21) 씨는 “드랙이 생각보다 정말 멋지고 당찼다”라며 “덕분에 저도 너무나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것 같다”고 전했다.

알리 씨가 다가와 소감을 물었다. 정말 많은 것을 느낀 시간이었지만 이런 생각들을 정리할 수 없어 당시에는 그저 즐거웠다는 말만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돌아보면 해방촌에서 느낀 감정은 즐거움만이 아니었다. 잊혀진 존재에 대한 슬픔과 스스로에 대한 반성 그리고 세상의 부조리함을 느꼈다. 그러나 필자가 배운 가장 큰 가치는 자신의 상처와 오래된 편견을 딛고 내가 아닌 누군가를 그 사람 자체로서 바라보고 사랑해야 한다는 존중의 마음이었다.

 

 

집에 오는 길 내내 ‘This is me’를 들었다. 여전히 우리 사회가 다양성을 맞이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사람들의 멸시 어린 시선 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찾아 당당하게 살고자 하는 이들의 모습은 강렬하고 아름다웠다. 이들의 정체성과 취향이 보편적인 상식이 될 그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며 오늘도 ‘This is me’를 듣는다.

 

“I know that there’s a place for us

(우리들을 위한 자리가 있다는 것을 알아)

For we are glorious”

(우리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존재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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