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이 온다. 새벽이 주는 새로운 향기도 동이 트면 사라질 것이다. 콜레트는 창가에 앉아 어둠이 내린 바다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녀는 아름다운 비알을 떠올린다. 

소설 <여명>은 청년 비알을 사랑하는 중년 콜레트의 자전적 소설이다. 중·노년기의 사랑은 주로 노을 혹은 석양으로 비유되는 것이 보통이며 그녀 또한 그를 가을에 찾아온 늦은 욕망이라 말한다. 하지만 콜레트는 작품에서 자신의 마음을 ‘여명’ 혹은 ‘새벽’에 비유한다. 어둠의 흔적은 선명하나 여전히 빛의 자취는 보이지 않는 바로 그 시간에 그녀는 창밖을 바라본다. 창백한 푸른빛 뒤에 숨은 햇빛. 그녀가 기다리는 것은 무엇일까.

사랑과 햇빛. 두 단어를 들으면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바로 ‘티끌 없는 마음의 영원한 햇빛’이라는 원제의 <이터널 선샤인>이다. 이 영화는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을 모티프로 하고 있다. 니체는 우리에게 ‘모든 것이 영원히 되돌아와도 그대는 삶을 사랑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는 운명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길 강조한다. 우리는 쉽사리 그렇다고 답하지 못한다. 가능하면 도망치고 싶은 것이 인생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다시 돌아가고 싶을 정도로 찬란한 순간이야 누구나 있겠지만 그와 함께 수많은 결점과 과오 그리고 그것들로 인한 감정 하나하나를 다시 겪는다고 하면 누구든 심각한 고뇌에 빠질 것이다.  

이 사상을 사랑에 대입하면 <이터널 선샤인>의 주제 그리고 영원한 햇빛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지독한 권태와 잦은 다툼으로 서로에게 상처만을 남긴 그 혹은 그녀를 당신은 다시 사랑할 수 있는가. 운명을 긍정하고 극복하듯 사랑 앞에서도 그런 태도를 지닐 수 있는가.

조엘은 담담한 목소리로 그렇다고 말한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서로가 지운 기억을 듣게 되고 이전 관계의 결말을 알게 된다. 클레멘타인은 조엘에게 자신은 불완전하며 그는 자신을 견디지 못할 것이고 자신은 그를 지겨워할 것이라고 고백한다. 그러고선 다시 실패를 반복할 것이 뻔하다며 조엘에게 이별을 고한다. 하지만 조엘은 담담하게 “그러면 어때”라며 클레멘타인을 안아준다.

우리는 온전한 사랑은 티끌 없는 마음 위에 가능하며 다툼 혹은 상처의 기억을 오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극 중 인물들처럼 기억을 지우고 싶어하며 상처로부터 도망친다. 하지만 우리는 불완전한 존재다. 니체는 불완전한 현실 너머 완전함으로 충만한 이데아는 없다고 말했다. 사랑도 그렇다. 서로에게 완벽할 수 없고 자신조차 스스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생성과 소멸의 운명을 따르는 현실과 그 현실이 아니고선 존재할 수 없는 인간에게는 영원은 불멸이 아닌 반복 즉 다시 시작하는 것에 있다. 어둠의 시간 속에서도 떠오를 태양을 생각할 수 있는 용기 바로 그 위에 사랑의 영원한 햇빛이 비칠 것이다.  

이제 새벽빛에 물든 콜레트의 얼굴을 바라본다. 비알과의 이별 후 여전히 새벽을 감각하는  그녀의 방에 붉은빛이 찾아들며 새로운 사랑을 암시한다. 남자를 멀리하라는 어머니의 충고와 실패한 지난 사랑 그리고 이미 늙어버린 자신의 육체도 그 빛을 막지 못한다. 그녀 또한 피하지 않는다. 그저 조엘의 담담한 대답처럼 늘 창가에서 새로운 사랑의 생성을 관조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그녀가 받아들인 자신의 여명(女命)은 다음을 기다리는 여명(黎明)으로 그 자체로 용기이며 삶에의 의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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