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 10일 한국 헌법재판소에서 재판관 만장일치로 박근혜 전 대통령의 파면이 선고됐다. 이는 ‘적폐청산’이라는 통합된 민심과 함께 비폭력 평화 시위가 맺은 값진 열매이자 역사적인 한순간이었다. 당시 BBC와 CNN 등 외신은 “한국이 성숙한 민주주의를 보여줬다”며 평화적인 촛불집회 현장을 보도했고 우리는 전 세계의 귀감이 됐다. 하지만 국민들이 이 같은 결실을 맺는 과정에서 무력을 행사했다면 오늘날 더 나은 민주국가를 향해 발돋움할 수 있었을까?

1922년 3월 18일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는 시민 불복종 운동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6년 형을 선고받았다. 간디는 언제나 비폭력 운동을 강조했지만 한때 일부 지역에서 폭도들과 경찰 사이의 폭력사태로 사상자가 발생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 결과로 희생된 경찰은 총 22명이었으며 그중에는 그들의 어린 자식도 포함됐다. 이에 간디는 전국의 모든 시민 불복종운동을 중단시켰다. 당시 일각에서는 우발적인 사건 하나로 순조롭게 진행되던 비협조 운동 자체를 중단하는 것을 수용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특히 인도의 급진주의 독립 운동가 수바스 찬드라 보스는 “그가 다른 주들의 대표들과 협의하는 성의조차 보이지 않았다”며 “대중의 열광이 폭발 점에 이른 순간에 퇴각의 명령을 내린 것은 국가적 재난이나 다를 바 없다”고 간디를 비판했다.

하지만 간디는 일말의 폭력이라도 가담한 투쟁은 결국 완전한 폭력 투쟁으로 번져갈 것이라고 확신했다. 당시 서양국가에 만연해있던 소극적 저항의 개념으로는 적을 이길 수만 있다면 어떠한 수단이라도 동원해 그들을 물리칠 수 있다. 물론 그 수단에는 언어나 행동으로의 폭력이 포함되기 마련이다. 반면 간디는 유럽인들의 입맛에 맞게 변해버린 이 소극적 저항을 부정했다. 그는 상대에 대한 증오와 저항이 아닌 스스로의 인내와 희생을 통해 영국으로부터 독립해나가고자 했다. 그리고 그의 진리대로 부당한 정부에 저항하고 국가개혁의 한 획을 긋는 순간은 항상 무력의 시위가 아닌 국민들의 끊임없는 호소와 고통을 감내하는 목소리가 울릴 때 시작되곤 했다.

2016년 겨울 우리나라에는 뜨거운 민심을 대변하는 촛불의 향연이 광화문 광장을 가득 메웠다. 학생부터 노인까지 저마다 하나씩 촛불을 들고 시국선언을 통해 국가 비리로 인한 세태를 비판했다. 간혹 일부 시민들이 경찰버스 위로 올라가 위협적인 행동을 보일 때면 사람들은 입을 모아 그들을 회유하고 달래며 폭력적인 시위가 되지 않도록 서로를 독려했다. 우리는 힘에 의한 권력이 아닌 국가의 주체로서 국민에게 부여된 정당한 권리를 가지고 바람직한 민주 사회를 만들고자 했다. 만약 두 손에 총기를 쥐고 정부를 향해 달려갔다면 역사는 폭력 투쟁과 피로 물든 광장만을 기억하게 됐을 것이다.

앞으로도 국민들은 올바른 정치가 지속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투쟁해야 한다. 다만 자주적인 국가를 향한 우리의 뜻이 맹목적인 투쟁으로 흘러가지 않게 하려면 그 방법은 언제나 평화롭고 이성적이어야 한다. “비폭력은 나의 신념의 처음이며 마지막”이라는 간디의 말처럼 광장에는 총성이 아닌 국민들의 단합된 목소리가 울려야 한다. 우리는 이로써 더욱 완벽한 민주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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