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2일 이번 르포를 준비하기 위해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에 가던 필자는 익숙한 광화문 길을 따라가다 낯선 조형물을 발견했다. 3.1운동 및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탑이었다. ‘우리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문구가 탑 정 가운데 가장 크게 적혀있었다. 3.1운동은 1919년 일제강점에 대항해 우리 민중 스스로 독립을 할 것이라고 외친 가장 큰 규모의 항일운동이다. 또한 단발성의 시위가 아닌 또 다른 시위의 도화선 역할을 하며 지속된 장기 운동이었다. 3.1운동으로 우리 민족은 수많은 희생을 감내해야 했지만 우리 스스로 주권을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발견하기도 했다. 이후 3.1운동은 국가 기념일로 지정돼 이번 해까지 100년 동안 그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선언서의 길을 따라 걷다

3.1운동의 준비와 시작에는 독립선언서가 있었다. 사람들은 함께 모여 선언서를 직접 쓰고 읽었다. 누군가는 혼자서 글을 쓰고 만세를 부르기도 했다. 3.1 운동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는 형태로 진행됐다. 독립선언서는 민중에게 독립에 대한 결의를 심어주고 만세 시위로 민중을 결집한 3.1운동의 숨은 공신이었다.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가 역사적인 민족 운동의 시작을 알리기까지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첫 번째로 찾아간 곳은 당시 천도교 월보를 발행하던 인쇄소인 보성사이다. “한 나라가 많은 돈을 들여 군대를 양성하는 것은 유사시에 대비함이 아닌가. 우리 보성사도 그 역할을 다할 때가 반드시 올 것이다” 보성사가 수입이 줄어 문을 닫으려 하자 민족 대표 33인이자 천도교 교주였던 손병희가 이를 말리며 한 말이다. 그의 말대로 3.1운동 전 보성사에서는 각각 1차와 2차에 걸쳐 2만 1천 매와 1만 4천 매 총 3만 5천 매의 독립선언서가 인쇄됐다. 독립선언서는 보성사를 시작으로 각 종교계 인물과 학생 그리고 교사들을 통해 비밀리에 전파됐다. 이에 3월 1일 ▲서울 ▲선천 ▲안주 ▲원산 ▲의주 ▲진남포 ▲평양에서 일제히 낭독될 수 있었다. 일제와의 또 다른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써 내려간 독립에 대한 열망이 지식인을 중심으로 전국 각지로 퍼져나가 3.1운동의 시작과 확산의 중추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그 당시 서울 한복판의 인쇄소에서 수 만장의 독립선언서가 인쇄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보성사 사장이자 민족 대표 33인이었던 이종일 씨는 이를 가능케 하기 위해 본인 가문의 족보를 인쇄하는 것처럼 위장해 극비리에 일을 진행했다. 보성사는 일제에 의해 독립선언서가 인쇄됐다는 것이 발견되자마자 폐쇄되고 불 질러 없어져 현재는 터만 남아 있었다. 또한 수송공원으로 남겨져 있는 터는 인쇄소가 들어서 있었던 곳이라고는 생각 못 할 정도로 작고 평범한 동네의 공원이었다. 그 조그만 인쇄소에서 수백만 명을 결집한 글이 나왔다는 것이 놀라웠다.

보성사 터를 나온 뒤 좁은 골목길 지나 10여 분을 걸은 후 태화관 터를 발견할 수 있었다. 태화관은 궁중 요릿집으로 3월 1일 운동 당시 오후 2시에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곳이다. 민족 대표 33인 중 선언식에 참석한 29인은 무력충돌을 우려해 예정돼있던 탑골공원에서 태화관으로 장소를 바꿨다. 이후 낭독과 만세 삼창 후 전원 자진 체포됐다. 이들은 독립 선언서 작성 외에 만세 운동의 조직화에도 힘썼다. 3월 1일에 서울을 포함한 여섯 개 지방에서 동시 만세 운동을 계획한 것이다. 조직적인 만세 운동 계획은 만세 운동의 전국화 및 확대에 큰 도움이 됐다.

 

 

마지막으로 방문한 곳은 탑골공원이다. 당시 파고다 공원으로 불렸던 탑골공원의 100년 전 3월 1일 정오에는 젊은 함성이 가득했다. 그곳에 모인 수많은 군중 사이에서 한 사람이 뛰쳐나가 팔각정에서 독립 선언서를 낭독했다. 선언문이 끝나기도 전에 군중들 사이에서 만세 소리가 터져 나오면서 3.1운동은 시작됐다. 한 편의 글이 거대한 운동으로 바뀌는 순간이었을 테다.

 

 

독립이자 건국, 독립선언

독립선언서는 3.1운동 정신의 근간이다. 운동의 시작은 늘 독립선언과 함께했고 운동은 선언서 배포로 확대됐다. 독립선언서는 파리강화회의에서 미국 윌슨 대통령이 모든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간섭받지 않고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고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에서 영감을 받았다. 하지만 독립선언서에는 민족 자결주의 이상의 내용이 담겨 있다. ‘본래 우리가 지닌 권리가 그렇기 때문이다’가 아닌 그런 권리를 지닌 이유에 대한 설명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동양 평화를 통한 세계 평화 ▲양심 ▲인류 평등 ▲인류의 행복 ▲진리 ▲5천 년의 역사에 대한 내용이 그것이다. 

 

 

이를 근거로 독립선언서에서는 3종류의 독립을 주장한다. 먼저 일제강점기에서의 해방이다.   ‘우리는 오늘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며, 조선인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한다’ 첫 문장에서부터 표면적으로 드러나 있고 가장 강조되고 있는 독립이다. 자국 독립은 독립선언서를 쓰게 된 목적이고 글 전체에서 근거로 들고 있는 핵심 주장이기도 하다. 두 번째는 국가 정체성의 독립이다. 이는 일제에 벗어나 단순히 정신적 그리고 육체적으로 해방되는 것에서 나아가 우리만의 가치관을 확립해 나가자는 시도다. 대표적 근거로 독립선언문에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격려하기 바쁜 우리는 남을 원망할 겨를도 없다’라는 구절을 들 수 있다. 이는 일제에서 독립해 하나의 국가로 인정받는 것보다 자국의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시도가 더 중요하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후에도 일제에 대해 감정적 비판을 배제하고 그들과의 정체성 차이가 크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언급이 많다. 이는 일제의 잘못을 일일이 나열하고 비난하는 것이 일시적인 감정으로 치부될 것에 대한 염려이자 이를 용서와 화합이라는 국가 정체성 확립으로 승화시킨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선언서의 이런 태도는 독립을 위해 일제를 설득하려는 시도로도 볼 수 있다.

마지막은 시대에서의 독립이다. 먼저 독립 선언은 ‘민족 자결주의’라는 시대의 흐름을 따라 기존의 시대에서 독립해 앞으로 올 새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봄기운 가득한 세계에 민족의 우수한 문화를 꽃 피울 것이다’라는 말로 세계의 변화에 발맞춰 독립을 이루어낼 것이라는 의지를 보인다. 또한 독립 선언은 인류 평등 그리고 민중의 삶과 행복을 근거로 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수천 년 동안 신분제 국가였다. 1890년대에 들어서야 동학농민운동과 갑신정변을 통해 신분제 폐지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독립선언서는 모든 인류가 평등하다는 뜻을 분명히 밝히고 국권침탈로 인한 우리 민중의 아픈 삶을 독립의 근거로 사용하며 오랜 관습에서 벗어난 변화의 목소리를 냈다. 그뿐만 아니라 독립 선언이 촉발한 3.1운동은 시대를 초월한 행동을 이끌어냈다. 그 시절 그 어떤 국가도 3.1운동과 같이 ‘비폭력’으로 대중을 일원화해 저항하지 못했다. 시대를 초월한 행동은 중국의 5.4운동과 간디의 비폭력운동을 이끌어내는 등 타국의 독립운동에도 영감을 주었다. 

이처럼 독립선언서는 3.1운동을 우리나라 독립의 초석으로 평가하기만은 아깝다는 것을 보여준다. 민족의 해방에서 한참 더 나아가 민족 고유의 정체성까지 목표로 정립한 독립선언서에 드러난 3.1운동의 정신은 국권 반환 이상의 새로운 국가 건국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뜨거웠던 만세의 현장 속으로

독립선언서는 일제의 보복을 두려워한 이들에게 여러 차례 거절당한 후 최남선에게 맡겨졌다. 이후 초고가 작성된 독립선언서는 한용운에게 넘겨져 공약 삼장이 덧붙여졌다. 최남선이 작성한 선언서의 내용이 3.1운동의 정신을 만들었다면 한용운이 덧붙인 공약 삼장은 3.1운동을 만들었다. 3.1운동은 공약 삼장에 따라 일원화와 대중화 그리고 비폭력을 원칙으로 진행됐다. 2019년 3월 1일 100주년을 기념해 서울 곳곳에 울려 퍼진 만세운동도 그 정신과 매우 닮아 있었다. 

오늘 보신각에서는 100년 전 이날 보신각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서울 시내 14개의 학교 후배들이 3.1운동을 재현했다. ‘대한제국 만세’라는 선창이 들리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목소리로 ‘대한제국 만세’와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 행사 진행자가 당시 열사들의 후손을 소개할 때마다 사람들이 들고 있던 태극기가 일제히 들리는 모습은 모두가 독립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태극기를 흔들었던 그 날의 현장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보신각에서의 만세 행사가 끝난 후 곧이어 학생들의 플래시몹이 시작됐다. 학생들은 일제의 만행에 고통받은 사람들에게 희망이 된 3.1 운동을 몸짓으로 표현했다. 플래시몹 말미에는 다 같이 만세를 부르기도 했다. 

 

 

보신각 행사를 끝내고 종각역으로 가는 길에 어디선가 ‘쿵 딱딱 쿵 딱딱’ 하는 북소리가 들려왔다. 좀 더 앞으로 걸어가 보니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행렬이 북을 두드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행렬 속에도 각각의 역할이 있어 어떤 사람들은 북을 두드리고 어떤 사람들은 나팔을 불고 또 다른 사람들은 맨몸으로 춤을 추며 행진을 하고 있었다. 마치 한국식으로 재해석된 퍼레이드를 보는 듯했다.

 

 

 태극기를 온몸에 두르고 행진하는 사람들과 얼굴에 한반도를 페인팅한 채 춤을 추는 사람들을 보자면 축제에 와 있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10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만큼 역사책에서 보는 것처럼 딱딱하고 지루한 3.1운동 행사를 생각했지만 직접 본 행사는 그것과 많이 달랐다. 3.1운동을 기억하는 방법은 시대와 대중에 맞춰 변화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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