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Me Too 운동이 사회를 뒤흔들고 있다. 매일매일 쏟아지는 기사거리에 충격적이기도 하고 때로는 당혹스럽기도 할 정도이니 말이다.

차기 대통령 후보로 유력하던 이가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로 지목되어 갑작스러운 정계 은퇴를 선언하는가하면 얼마 전까지 연예계 활동을 활발히 하던 중년의 한 배우가 제자들의 성추행 폭로를 비관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도 있었다. 대중의 관심을 한 몸에 받던 그들의 추락을 바라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들에 대한 분노를 쏟아내고 있다. 이러한 분노는 이중적인 그들의 모습에 대한 배신감과 그들 곁에서 어쩔줄 몰랐을 피해자들에 대한 연민으로 비롯된 것이라고 짐작해본다.

피해자의 울분과 가해자의 파렴치함. 숱하게 쏟아져 나오는 말 사이에서 이질감이 드는 말들이 있다. 가해자의 전횡과 피해자의 아픔을 버젓이 알고 있었음에도 침묵하고 있다가 Me Too 운동이 사회적인 이목을 끄는 지금 슬그머니 피해자로 둔갑하고 있는 ‘방관자들’의 ‘말’이다.

자신만 아니면 된다는 이기심 혹은 자신에게 불이익이 생길까하는 두려움 등 어떤 감정일지는 몰라도 많은 이들이 수 년간 성추행과 성폭행을 알면서도 지나쳤다. 그러나 수많은 도움의 기회와 피해자들의 수많은 요청에도 묵묵부답이였던 그들이 지금에서야 피해자의 모습에 공감하고 아파하는 모습을 보이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방관자들도 가해자들 못지 않게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러한 방관자들에게 쉽사리 비판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이는 우리 중 누구도 이러한 상황에서 방관자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는 슬픈 현실 때문일지도 모른다.

방관과 무관심은 성범죄를 심화시켰다. 가해자는 침묵하는 대중들 속에서 더 무시무시한 논리를 만들어냈고 자신들의 과오를 교묘히 감춰왔다. 이번 Me Too 운동에서도 이와 다를 바 없다. 가해자는 Me Too를 외치는 피해자들에게 ‘연정관계였다’ 혹은 ‘단순한 애정표현이였다’ 등과 같은 말로 자신들의 성범죄를 미화시킨다. 또 이에 반응하는 대중들은 ‘잘나가는 사람의 발목을 붙잡는다’ 혹은 ‘왜 당하면서도 가만히 있었냐’ 등과 같은 말을 하며 피해자를 옹호하기 보다는 탓하고 있다. 불합리한 성추행과 성폭행을 외치며 처벌을 호소하는 여성들에게 또 다시 침묵을 강요하고 폭력을 재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악순환의 굴레를 끊어내야한다.

Me Too 운동은 침묵을 강요하는 사회를 깨고 나온 용기있는 선언이다. 우리가 그들에게 주어야할 것은 침묵을 깬 대가가 아닌 침묵을 깨고 나온 용기에 대한 찬사와 두려움에 떨고 있을 그들에 대한 지지와 동조이다. Me Too 피해자와 함께하는 With You 운동의 확산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번 운동을 계기로 지난 날의 과오를 반성하고 침묵을 강요하는 가해자의 말과 행동들에 경계해야 한다. 또한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으로도 또 다시 방관자가 되지 않겠노라는 다짐을 해야한다.

헤르만 헤세가 쓴 소설 데미안에는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누구든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 라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그 누구든 태어나고자 하는 자는 자신만의 알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한 투쟁을 하고 알은 그저 이를 유지하려고한다. ‘침묵의 알’을 깨기위한 ‘Me Too의 태동’. Me Too의 태동은 이미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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