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밥상공동체 허기복 대표

인터뷰를 하기위해 연탄 나눔 봉사가 진행되는 영등포로 향했다. 역전 계단을 오르자 급하게 부는 찬바람이 쪽방촌 골목으로 나를 안내했다. 골목골목엔 슬레이트 지붕 위에 비닐을 덮어씌운 허름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그 뒤로는 영화관과 대형마트 같은 거대한 건물들이 골목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낯선 풍경에 둘러싸여 어리둥절한 내게, 왠지 모르게 익숙한 외모의 중년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봉사활동이 끝난 후에 인터뷰를 하자며 미안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봉사자 분들과 함께 연탄 1천 5백장을 집집마다 나르고 난 뒤 근처에 있는 작은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Q. 밥상공동체가 어떤 의미이고 어떤 활동을 하는가
A.밥상공동체의 시작은 98년 외환위기 때 시민운동과 민간자원 중심으로 강원도 원주에 있는 쌍다리 둔치에서 시작됐다. 그 당시 외환위기 때문에 실직한 분들, 혼자 사시는 어르신들, 집을 잃은 분들에게 가장 필요한 가족의 의미를 되찾아 주고 사회로 희망을 안고 돌아갈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였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우리나라는 밥상 문화가 아닌가. 밥상을 통해 가족애가 생기는 것 같다. 밥을 먹으면서 오순도순 이야기도 하고 그러면서 힘을 얻는다는 것에 밥상의 참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가 밥상을 나누는 시민운동을 하게 됐고 그게 ‘밥상공동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Q. 사람들을 돕게 된 계기가 있나
A.난 가난한 부천 오정동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때 도시락을 싸가지 못해 친구들 밥을 십시일반 하여 점심을 해결하기도 하고 신학생 시절에는 철야예배가 끝나면 낡은 구두를 벗어 손에 들고 맨발로 산길을 넘곤 했다. 연탄 한 장이 없어 겨울이면 옷을 겹겹이 껴입고 잠이 들어야 했고 아침에 일어나면 주전자 끝에 매달린 고드름을 간식 삼아 떼어 먹기도 했었다. 유년 시절부터 밥 한 그릇과 연탄 한 장의 의미는 내 머릿속 깊숙이 아로새겨질 수밖에 없었다. 한 번이라도 굶주려본 사람이라면 인간에게는 먹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 거라고 본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먹는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잘 알게 됐으며 가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오기를 선물로 받은 것 같다. 그 힘이 나를 지금까지 이 일을 하도록 이끌어 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Q. 밥상공동체에 찾아온 위기와 그것을 극복한 일이 있었나
A.사연은 많다. 시민운동을 하다보니까 쌀도 떨어져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하던 때도 있었다. 하루는 스님 한 분이 쌀 두 가마를 가져왔다. 내가 목사인데 이걸 받아야 되나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이웃을 위해서 쓰는 것은 종교적인 차원을 넘어야 된다는 생각이 들어 결국 받았다. 신기하게도 그 뒤로부터는 15년째 쌀이 떨어진 적이 없다. 깡패들과 마주한 적도 있었다. 다리 밑에서 밥상공동체를 하던 도중 거기 있던 깡패들이 행패를 부려댔다. 나한테 다리 밑에 전세 냈냐고 성을 내며 그 중 한 명이 병을 탁 깨더니 다가오더라. 겁이 났지만 나도 나쁜 깡다구가 아닌 선한 깡다구를 냈다. “이 자리에서 죽는 것은 걱정 없다. 나야 죽어서 하나님 곁으로 가면 그 또한 기쁨이지만 너희들은 철장 신세를 질 터인데 어쩌려고 이러느냐”며 설교를 하니 한 명씩 사라지더라. 그 이후로 내가 넥타이를 안 맨다. 잡아당기면 목 졸리니까. 지금도 교회 가서 이야기할 때도 넥타이는 안 맨다.
언젠간 겨울이 오자 더 이상 밖에서 밥상공동체를 할 수가 없어 급식소로 쓸 건물이 필요했다. 그러던 중 안성맞춤인 자리를 찾았는데 임대료가 2천만 원이더라. 당장 밥을 지을 쌀도 부족한 처지여서 눈앞이 깜깜했지만, 이내 힘을 되찾고 천원 모으기 운동인 ‘천사 운동’을 시작했다. 처음엔 사람들이 나를 외면해 매우 힘들었다. “혹시 저렇게 돈 모아서 목사 혼자 엉뚱한 데 쓰는 거 아냐?”하며 수군거리기는 소리도 들었다. 하루는 내가 새벽에 문을 두드리니까 어떤 사람은 남편인줄 알았는지 술 먹고 늦게 들어오냐고 파자마 바람으로 남편 이름을 부르며 문을 열어주기도 했다.(웃음) 어쨌든 그런 날들이 쌓이고 쌓여 45일 만에 보증금 2천만 원이 모여 결국 급식소 임대 계약을 했다. 아마 1998년 11월이었을 거다. 아직도 그 날을 잊을 수가 없다.
하루는 임대한 급식소 옆 부지 70평을 그동안 강연하고 받은 돈과 원고료를 모아 7천만 원 주고 샀다. 밥상공동체 식구들이 그 곳에 합판과 쇠파이프, 스티로폼, 보온덮개를 가지고 가건물을 지었다. 어설펐지만 모두의 피와 땀으로 지은 꿈의 건물이었던 것이 지은 지 5년이 되던 해에 몽땅 타버렸다. 모두 힘이 빠져버렸다. 화재가 났을 때 ‘내가 뭐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불이 나게 해가지고 힘들게 하냐’며 하나님 원망도 했었다. 하지만 내가 주저앉을 순 없었다. 고난을 부흥의 기회로 삼자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해서 4월 30일부터 6월 30일 까지를 기한으로 잡고 시작한 모금운동이 ‘1만 원씩 1만 명이 내면 1억 원이 되는 ‘1만 원, 1만 명 운동’이다. 가까운 초등학교를 비롯해 원주의 여러 고등학교와 대학교, 후원단체, 공기업, 공공기업 등 여러 곳에서 후원금을 보내주었고 인터넷 포털 사이트 엠파스에서는 광고를 해주고 전 직원이 1만원 씩 모아서 우리를 도와주었다. 그렇게 해서 9천 9백 99명이 모금을 했고 마지막 1만 번째 기부자 명단에는 예수님의 이름을 올렸다. 1만 명 까지만 후원금을 받겠다는 내게 사람들이 “왜 굳이 1만 명이냐고, 더 받아서 좋은 데에 쓸 수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귀가 솔깃해서 그렇게 했다.(웃음) 비품 구입에 썼다.

Q. 연탄은행을 시작하게 한 사건이 무엇인가
A. 추운 겨울에 연탄이 없어 일주일이 넘도록 이불만 뒤집어쓰고 있는 할머니를 본 적이 있다. 정부 차원 복지의 사각지대에 있는 그런 분들이 많은 것 같다. 요즘에 어려운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자식이 있으면 수급자로 선정이 안돼서 복지혜택을 못 받는다. 자식이 효도를 안 하면 별 수 없는 거다. 어쨌든 그렇게 주저하고 있는데 후원자 함종성 씨가 연탄 1천장을 기부하겠다면서 나보고 연탄봉사를 하라고, 하라고 하는 거다. 그 할머니 생각에 밤잠도 설치고 그래서 결국 연탄봉사를 하게 됐다. 사람들이 내게 왜 연탄은행이라고 이름을 지었냐고 물을 때마다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은행에는 돈이 많다. 그래서 이름을 연탄은행이라고 지었다. 연탄이 떨어지지 말라고.

Q.연탄은행은 현재 얼마만큼 성장했나
A.처음엔 원주에만 있었는데 서울도 연탄이 필요하다는 요청이 왔다. 그래서 처음엔 원주에서 서울로 연탄을 보내다가 다른 지역에도 연탄은행을 만들기 위해 곳곳에서 모금운동이 이뤄졌다. 그래서 연탄은행이 춘천에 생기고, 부산에도 생기고…. 서울에도 생겨서 전국에 30곳으로 늘어났다. 중앙아시아 키르키스탄까지도.

아무것도 없이 시작해서 이렇게 시민운동이 커지게 된 것은 절박함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정부 보조금 없이 하니까 치열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이게 결국은 다 시민들의 모금 덕분이다.

Q 행복은 어디에서 온다고 생각하나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있는데 그걸 발견하지 못한 것일 뿐이라고 본다. 그래서 1천억을 가져도 행복하고 감사할 줄 모르면 불행한 건데 가난해도 내가 살아있다는 자체를 기적이라고 생각한다면 소유에 의한 행복보다 좋다고 생각한다. 파지를 주우러 리어카를 끌고 가시는 할머니가 노래를 흥얼거리는 걸 보니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 ‘아, 행복은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감사하게 생각할 때 나타나는구나’ 라고 말이다. 행복을 너무 멀리서 찾지 말고 내 삶에서 감사하다고 하는 순간, 행복이라고 하는 파랑새가 날개를 좀 피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Q. 목사님은 연탄이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나
A. 연탄은 주위를 따뜻하게 하고 타고나면 연탄재로 남아서 사람들이 눈길에 미끄러지지 않게 해주는 서민들의 애연과 아픔이 깃든 것이다. 혼자 타지 않고 두 장이 있어야 비로소 제대로 된 불꽃을 내는 연탄은 항상 둘이라는 개념인 거다. 공동체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봉사든 뭐든 우리가 그분들에게 시혜를 베푸는 게 아니다. 부모님 사랑도 받고, 친구들 사랑도 받으면서 자랐기 때문에 봉사는 자신이 빚진 사랑을 되돌려주는 행위다. 자랑할 것도 없는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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