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차가운 숨을 내쉴 때 봄은 뿌리부터 온기를 틔우며 균열을 이룬다. 봄은 새로운 시작이라고도 하지만 어찌 보면 새로운 균열이다. 얼었던 땅에 생긴 틈이 갈라지며 솟구치는 생명들이 자리를 잡아야만 뿌리를 내리고 싹이 나 녹음이 펼쳐진다. 꽃이 만개하기 전에 대학은 개강한다. 2월 말 만해도 봄이 올 것처럼 따듯했지만 3월이 되고 개강을 하니 거짓말처럼 날씨가 추워진다. 환절기 감기 몸살처럼 찾아오는 불안은 시작에 대한 설렘과 같이 오기 마련이다. 꽃이 만개하기까지 우리는 계절의 몸살을 겪고 불안과 설렘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뇌한다. 즉 꽃의 피는 환희를 느끼기 위해서 우리는 겨울부터 봄이 오기 전까지 내내 떨며 불안을 견뎌야 하는 것이다. 흔히 꽃이 피면 우리는 꽃놀이라는 것을 한다. 꽃비가 내리는 거리에서 연인들은 손을 마주잡고 가족들은 나들이를 나와 김밥을 먹으며 즐긴다.

하지만 봄의 환희를 마냥 즐기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직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들 혹은 일을 하기 위해 사무실에 있는 직장인들과 같은 사람들이다. 이맘때쯤 나의 봄은 환희보다는 불안에 더 가까웠다. 몸이 아파서 그만두었던 입시를 다시 시작해야 했기 때문이다. 공부를 한다는 사실보다 더욱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던 것은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디는 것이었다. 같이 길을 걷던 친구들이 나를 앞서가자 뒤처지는 느낌이 들어 불안했다. 창문 사이로 햇살이 들어오고 벚꽃이 만개해 세상이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웠지만 여전히 나에게 진정한 봄은 찾아오지 않았고 마음은 적막한 겨울이었다. 한번은 독서실에서 집에 돌아가는 길이었다. 다 떨어져 사람들의 발에 밟혀 으스러진 꽃잎들을 보며 마음이 짠했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다시 올 봄을 기다리며 차갑게 식어가는 꽃잎들이 나의 처지와 같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지고 피는 봄을 지나면 여름이 온다. 뜨겁다 못해 타버릴 듯한 더위지만 생물들은 열심히 바닥을 기어다니고 사람들도 짜증은 내지만 길어진 낮만큼 길거리에도 오래도록 사람들이 붐빈다. 무더위와 불쾌한 땀방울 앞에서 그간의 불안과 설렘은 힘조차 쓰지 못하고 쓰러진다. 무엇보다 더운 계절이지만 생존을 위해서 어느 계절보다 생의 움직임 활발하다. 생존 앞에서 감정은 사치일 뿐 오직 살아남기 위한 최소한의 움직임과 전략들이 깨어난다. 나 또한 그랬다. 막연한 불안은 더위에 녹아 형태가 불분명했고 이 여름을 견뎌 가을의 열매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사리진 줄 알았던 불안은 무기력으로 찾아왔다. 더위에 지친 틈을 타 불안은 무기력증이란 이름으로 찾아왔다. 불분명했던 것이지 완전 사라진 게 아니었다.

그러자 차츰 계절이 걸음마를 할 때마다 찾아오는 불안이란 손님이 원망스러웠다. 균열을 겨우 메워 안전한 지대를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또다시 생겨나는 마음의 틈이 지난 노력을 헛수고로 만든 기분이었다. 열심히 모래를 뭉치고 토닥여 만든 모래성이 물방울 하나로 갈라져 무너졌다고 생각해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하지만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이와 같은 일을 수도 없이 겪을 수밖에 없다. 그럼 계속해서 반복되는 순환의 불안 속에서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이 생기기 마련이다. 나 또한 입시 내내 혹은 매번 봄을 겪고 계절을 겪으면서 고민해 왔다.

머리를 끙끙대며 애써 찾아낸 답은 매우 단순했다. 관점을 바꿔 생각해 보니 균열이 없으면 변화도 없다는 점을 발견했다. 계속 불안이 주는 무기력함과 허무감만 생각해서 미처 보지 못한 면이다. 균열이 없으면 변화도 없을 것이다. 열망과 욕망은 땅을 뒤흔들고 변화를 만든다. 즉 열망과 욕망은 균열에서 나온다. 메마르고 차가운 겨울의 땅이 녹는 것도 균열에서부터이다. 매번 땅이 갈라지는 모양이 다르기 때문에 싹들은 움트기 위해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것이다. 이생의 치열함이 여름 장마를 견딜 뿌리를 자리 잡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매번 찾아오는 불안 때문에 변화를 두려워 안주한다면 오히려 꽃을 피워내기 힘든 것이다. 따라서 나는 불안을 변화를 위한 동력으로 삼아 발전하기로 다짐하며 나의 봄을 되찾았다.

저작권자 © 아주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