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위로’, ‘자기 최면’이 아니라 그동안 잊고 살았던, 억누를 채 숨겨왔던, 이유도 모른채 감추어야 했던 자기 자신의 본 모습을 찾는 여행이 되길 -남해 여행 中-

 

회파란색이 바탕이 된 새벽 길을 나섰다. 찬 공기가 온몸을 감싸왔지만 개의치 않았다. 오늘 목적지는 남해였다. 그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래에 있는 섬, 어릴적 언뜻 스쳐 들어보았던 곳. 나에겐 남해는 그랬다. 홀로 정류장에 앉아 졸린 눈을 비비며 생각했다. 
날이 밝아오는 겨울 아침, 유한봄(사회·2) 학우와 함께 남해를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얼마지나지 않아 빽빽했던 건물을 벗어나 끝없을 것 같은 도로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바깥의 차가운 공기가 버스를 감싼듯 투명한 창문은 습기로 가득찼다. ‘뽀득뽀득’ 손으로 창을 문지르고 창밖을 쳐다보았다. 모든 것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버스가 앞을 향해 달릴수록, 나의 삶터에서 멀어질수록 마음은 편해졌다. 몇 개월간 바쁜 일과에 치이면서 계속해서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어떤 생각도 고민도 멈추고 그냥 쉬고싶음을 갈망했었다. 그리고 그저 아무생각없이 흘러갈 수 있는 지금이 좋았다.
 
해가 진 후 독일마을의 모습이다.
해가 진 후 독일마을의 모습이다.
 
반가워 남해야!
장장 9시간을 걸쳐 남해에 도착했다. 이른 새벽에 출발했는데 그곳에 도착하니 늦은 오후였다. 한적한 시골 마을, 작은 가게들이 각자의 지붕아래 줄지어져있을 뿐이었다.
생각도 잠시, 걸음을 옮겨 독일마을로 향했다. 그 곳에 도착했을 쯤엔 해가 사라지고 추위가 조금씩 맴돌기 시작했을 때였다. 우리는 작은 가게에 들어가 몇시간 동안 주린 배를 채우기로 했다. 빨간 빛을 띈 난로옆에 앉아 먼 길을 걸어온 나그네 마냥 몸을 녹이기 시작했다. 눈에 비치는 풍경은 앙상한 나뭇가지와 몇 개의 봉우리를 가진 산이었다. 마치 시간이 멈춰있는 것만 같았다.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모든 것은 정지됬지만 홀로 움직이듯 말이다.
끼니를 떼우고 다시 몸을 일으켜 향한 곳은 독일마을의 모습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주황색 지붕으로 한껏 멋을 낸 집들은 어둑한 하늘을 품은 채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희미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곳에 서있는 우리는 어떠한 인기척도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느낌에 푹 빠져 아무말 하지 않았다.
한봄: “항상 사람들 속에서 내가 익사당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곳에서는 나는 이방인이고 아무도 나에게 관심이 없어. 내가 수원에 있을 때는 항상 사람들과 잘지내고, 더 많은 사람을 알게 되는 것이 좋고 그 과정에서 나를 남들에게 맞추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이곳에 와서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으니 마음이 너무 편해” 
 
남해 게스트하우스에 머물고 간 여행자들의 발자취이다.
남해 게스트하우스에 머물고 간 여행자들의 발자취이다.
sin prisa, pero sin pausa (서둘지 말되 멈추지 말라)
기나긴 하루를 정리하며 우리는 게스트하우스에 들어왔다. 낯선 땅에서 지친 몸은 제집 안방이라도 찾은 듯했다. 여러 곳의 게스트하우스들을 가본 적이 있었지만 이 곳은 다른 곳과 달리 따뜻한 온도를 지니고 있었다. 
슬리퍼를 신고 건너방으로 넘어간 곳에선 수 많은 책들이 노란 빛 조명아래에 다소곳이 자리를 잡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푹신한 손뭉치를 배게 삼아 책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책장 밑 가로로 길게 늘어져 있는 작은 틈 사이로 둥지를 트고 있는 노란색 종이들이 붙어 있었다. 그 종이에는 작은 정자체의 글씨로 “이 곳에 오신분들, 아무것도 아무말도 하지말고 가만히 몸가는대로 눈가는대로 그냥두세요”라고 쓰여있었다. 이는 이곳에서 쉬고간 나그네들이 이곳을 들릴 나그네를 위해 남긴 발자취였다. 
나는 원래 말을 즐기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이야기를 항상 이어 가고 있었다. 혹여 나로 인해 기분이 상할까 눈치가 보였던 것일까. 그저 무리에 속한 평범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일까. 은은하게 담소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약간의 사색에 잠기게 됐다. 그날은 누군가의 눈치도 어떠한 시선도 볼필요가 없었다. “오늘만은 온전히 나로 그냥 편안히 있고 싶어.” 
남해는 공기가 맑아 날씨가 좋은 날에는 많은 별을 관찰 할 수 있다는 말이 생각나서 였을까잠깐의 공상을 깬 뒤 무작정 옥상을 올라갔다. 설마했던 기대가 까만 하늘에 박혀있는 별들을 보며 탄성으로 답했다. 아름답다는 단어로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라 해야할까. 눈안에 많은 별이 빼곡이 담을 수 있었던 건 나에게만 주어진 그날의 특별한 행운이었을지도.
 
남해 다랭이마을의 모습이다.
남해 다랭이마을의 모습이다.
 
다랭이 마을
하루사이 따뜻한 꿈을 꾼 후 새로운 여정을 떠났다. 여행의 마지막 단추가 될 곳으로 말이다. 버스는 꼬불꼬불한 산길을 타고 올라가 우리를 살포시 내려주었다. 따뜻한 산들바람이 볼을 스치며 귓가에 속삭였다. ‘앞을봐’. 고개를 들은 난 머리를 맞은 듯 멍하니 서있었다. 불과 어제 아침 남해행 버스에 올라서며 뭉뜨그리며 바라던 것이 생각나서였을까 양쪽 볼은 불그스름하게 뜨거워졌다. 청록색 계단식 논위에 옹기종기 갖가지 집채들과 푸르른 바다는 날 비웃듯 어울려있었다. 바다아래 돌멩이는 햇빛에 비추어 반짝였고 찰랑거리는 파도는 절벽과 함께 시원한 음색을 퍼뜨리고 있었다. 어릴 적 보았던 동화책에서 나올 듯한 파스텔 색의 그림이었다. “수 개월간 나를 억누르던 모든 것들이 신기하게도 다 날아간 것 같아…”
한봄: “사회생활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가장 좋았어. 이 곳에서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마음에 들지 않다고 표현을 해도 상관 없고 나의 감정을 숨기지 않아도 돼. 내가 느끼는 것이 이 여행의 느낌이 되고, 나의 생각이 이 여행의 기억이 되니까. 내 감정과 내 생각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쉬운 일 같지만 꽤나 어려운 일이 였어. 이제는 남들이 하는 말들이나 행동에 휘둘리지 않고 나의 생각에 집중해보려고해” -유한봄 학우 
 
여행을 마치며
1학년 여름방학, 무언가 제대로 배워보고자 싶은 마음에 학보사를 들어왔다. 새로운 것을 두려워 하고 이를 피하기 바빴던 나로서 학보사 지원은 정말 큰 도전이었다. 하지만 시작과 동시에 취재를 위해 사람을 만나야했던 난 그것이 무서워 몇 시간동안 발을 동동거리기 다반사였다. 하루하루 어려운 과제를 받은 어린아이처럼 아등바등 다른사람의 뒷 꽁무늬를 쫒아가기 바빴다. 그리고 어렴풋이 기자모습이 보일때쯤 남해여행을 오게 됐다. 나 자신을 나무라기 바빴던 지난 6개월을 잊고 오늘 나는 나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잘하고 있어. 수고했어. 조급해 할 필요없어” -김예빈 기자
한봄: 우리는 항상 외롭다고한다. 외로울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느끼는 많고 많은 감정들 중의 하나이다. 만족스럽고, 쓸쓸하고, 놀라고, 그립고, 흐뭇하고 …. 외로움은 여러 가지 감정들 중에서 하나의 감정일 뿐이다. 이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고 스쳐 지나가는 감정들 중에 하나일 뿐이다. 혼자 여행을 가는 것이 외로울까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 할 것이다. 여행이 단지 일상으로부터 해방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을 변화시키는 양분이 될 수도 있다. 여행에서 들었던 생각이 나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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