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소녀상...
평화의 소녀상...

하루 평균 50명 이상의 군인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50명 이상을 상대하다 보면 지치고 기절할 때가 있습니다… 성기가 부르트고 도저히 아파서 걸음도 걸을 수 없게 되고 더 이상 군인을 상대할 수 없게 되면 팔에 마약주사를 놓았습니다… 토,일요일에는 100명도 넘는 군인들을 아침 9시부터 상대해야 했습니다. -故 정서운 할머니-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나라의 수많은 소녀, 그리고 여성들이 일제에 의한 성노예생활을 했다. 당시 강제로 끌려간 우리나라의 소녀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을 겪었다. 그럼에도 우리 정부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고통에는 전혀 공감하지 않았고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과 졸속합의를 했다. 12·28 합의가 있기까지의 경과들을 통해 그리고 12·28합의의 내용을 통해 무능한 정부의 실체를 기억해 보려한다.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임”

[12·28합의까지의 경과]

1991년 8월 위안부 피해자인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은 위안부 운동의 출발점이 됐다. 그로부터 약 1년 뒤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가 시작됐다. 물론 20년의 외침동안 일본측은 미동도 하지 않았지만 할머니들 곁에 소녀상이 등장했다. 이 소녀상을 통해 다시금 시민들은 일제의 파렴치한 행위에 분노했고 할머니들의 아픔에 공감했다.

역시나 박근혜 정부는 아니었다. 소녀상을 보며 위안부문제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가 채 가시기도 전인 2015년 12월 28일 한일 위안부 합의를 강행한다. 일제의 행위에 인권을 유린당하고 무수한 고통을 겪었던 이들의 외침을 한순간에 토막냈다.

12·28합의에 이르게 된 경과는 20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 정부는 2005년 8월 26일 “일본군위안부 문제 등 일본 정부· 군 등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해서 일본정부의 법적 책임이 남아있다”는 입장을 명확히 밝혔다. 하지만 그 후 한국 정부의 적극적인 조치는 이뤄지지 않았다. 이에 2006년 위안부 피해자들은 한국 정부의 태도에 문제를 삼으면서 헌법소원을 제기했고 2011년 8월 30일 헌법재판소는 “한국정부가 해결에 나서지 않아 피해자들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있는 것은 위헌이다”는 결정을 선고했다.

한국 정부는 이러한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받아들여 일본정부에 대해 협의를 요구했고 2015년 12월 27일 국장급회의를 거쳐 다음날인 28일 이른바 12·28합의를 단행했다.

 

[이상한 내용, 애매한 표명사안]

문제는 이러한 맥락상에서 탄생한 12·28합의의 내용이다. 2005년 당시 한국정부가 일본정부에게 법적 책임이 있다고 분명히 밝혔고 그에 따른 논의 끝에 12·28합의를 하게 됐다면 반드시 일본 측의 법적 책임에 대한 추궁을 해야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우리 정부는 일본의 법적인 책임에 대한 기술을 끌어내지 못했다.

일본측 표명사항 중 첫 번째를 보면 ‘일본 정부는 책임을 통감함’이라는 애매한 문구를 달고 있다. 이를 보고 ‘도의적 책임인지 법적 책임인지는 해석상의 여지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지만 합의 이후 일본측 외상의 발언은 일본이 법적책임을 이행할 의지가 없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키시다 후미오 외상은 합의 직후 있었던 기자회견에서 “책임의 문제를 포함해 일·한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일본 정부의 법적 입장은 종래와 전혀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위안부 문제가 불거졌던 시점부터 일본은 ‘위안부 가해자로서의 법적책임이 없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다는 것을 고려했을 때 일본 측이 책임을 통감한다는 내용은 도의적 책임은 있으나 법적책임은 없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일본 측이 법적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일본 측 표명사항 두 번째에서 더욱 명확해 진다. 일본 측 표명사항 두 번째는 ‘한국 정부가 전 위안부분들의 지원을 목적으로 하는 재단을 설립하고, 이에 일본 정부 예산으로 자금을 일괄 거출하고…’로 표명돼 있다. 만일 외교부의 해석대로 일본측의 책임 부분이 법적책임을 이행할 의도에서 나왔다면 두 번째 표명사항의 ‘자금’은 ‘배상금’으로 기입돼야 했다. 배상금은 법적책임의 결과로서 나오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또한 합의 직후 키시다 외상이 ‘자금’은 ‘배상금이 아니다’고 못박았다. 이를 통해 12·28합의는 일본의 법적책임을 끝내 물을 수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측 표명사항도 이상하다. 오랜 위안부 피해자들의 염원이었던 ‘일본의 법적인 책임’도 묻지 못하고 우리 정부는 ‘일본정부가 재단을 설립하고 자금을 거출하는 것을 지킨다는 전제로 이 문제가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임을 확인함’(우리 측 표명사항 1번)이라고 표명했다. 즉 돈을 받는 대가로 위안부 문제가 해결됐다고 인정했으며 이 합의를 불가역적으로 확인까지 해준 것이다.

 

“강제성 빠진” 12·28합의

 

[진일보한 합의가 아닌 퇴보적 합의]

평화의 소녀상...
평화의 소녀상...

12·28합의로부터 1년이 지난 2016년 12월 29일 윤병세 장관은 “뜨거운 감자처럼 누구나 다 피하고 싶은 협상인데도 정부가 정공법으로 해결하겠다는 의지로 해결했다”며 “12·28 합의는 과거 어느 때보다 진일보한 결과”라고 밝혔다.

그러나 2015 합의는 1993년 있었던 ‘고노 담화’보다도 크게 후퇴한 모습이다. 고노 담화에서는 ▲위안소가 국 당국의 요청에 의해 설영됐다는 것 ▲위안부의 모집이 군의 요청으로 본인들의 의사에 반하여 이뤄졌다는 것 ▲위안소에서의 생활도 강제적이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고노 담화에서는 종군위안부가 일본군의 강압에 의해 본인의 의사를 침해당했다는 점을 명확하게 드러난다. 반면 12·28 합의는 ‘위안부 문제는 당시 군의 관여 하에 다수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힌 문제’라고만 일축한다. 결국 12·28합의는 진일보한 것이 아닌 10년전의 고노 담화보다도 퇴보한 합의라고 볼 수 있다.

 

무능하고 공감능력 결여된 외교부는 반성해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성난 민심이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는 요즘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그 민심에 기름을 붓고 있다. ‘공관 앞 조형물이 바람직하지 않으니 위치를 바꿔야한다’ 등으로 말이다.

보통 정부는 민심 혹은 여론이 좋지 않을 때 국민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행위는 잘 하지 않는다. 그런데 최근 외교부의 행보는 이러한 상식을 뛰어 넘는다. 각종 부정부패가 만천하에 알려지면서 박근혜 정부의 신뢰도가 바닥을 치는 요즘 사람들은 외교부의 그러한 ‘깡’이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해 할 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외교부는 성난 국민과 야비한 일본 사이에서 허둥대는 모양새다. 일본은 계속해서 소녀상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고 실제로 지난 3일 일본은 소녀상을 위안부상으로 통일해 부르겠다고 밝혔다. 12·28합의 당시 한국 측이 표명한 사항을 지키라는 일종의 으름장일 것이다. 이를 외면하지 못하는 외교부는 그와 관련된 사항을 이행하려고 노력하고 그 노력의 산물로 군중들의 분노는 더욱 커져만 간다. 결국 외교부는 본인들이 덜컥 합의한 내용 때문에 전 국민의 괄시를 받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외교부 입장에서도 이러한 상황이 괴로울 것이다. 관계 하나만 틀어져도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이 인간의 본성인데 전 국민과의 관계를 등지고 본인들이 욕먹을 얘기를 할 수 밖에 없는 것도 고역이리라. 일본의 성화에 못이겨 국민들 앞으로 나아갈 때 두렵고 단상에 서서 ‘저를 욕해주세요’하는 것은 더 큰 괴로움일 것이다.

외교부는 이러한 고통스러운 상황이 본인들이 자초했다는 것을 자각하고 그것을 반면교사 삼아야한다. 또한 본인들이 체결한 멍청한 합의로 인해 겪는 고통을 통해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배워야한다. 12·28 합의 당시 위안부 피해자들은 억장이 무너지는 고통을 겪었다. 지금 외교부가 겪는 고통은 위안부 피해자들이 겪은 것에 비할 바 아니지만 이를 통해 조금이나마 나은 외교부가 되어야 한다. 또한 본인들의 무능이 타인에게도 피해를 줄 뿐만 아니라 결국 그 무지의 덫에 본인이 걸린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저작권자 © 아주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