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참 많은 음악 프로그램들이 TV에서 방영된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가수뿐 아니라 일반인들이 출연해서 노래 실력을 자랑하는 프로그램들이다. 좀 전에는 가수 또는 가수 지망생들이 나와서 경연을 벌이는 형식이 인기를 끌었는데 요즘에는 그냥 일반인들이 나와서 때로는 전문적인 가수들과도 어우러지며 자신들의 기량을 뽐내고 무대를 즐긴다. 노래를 통해 소통하고 화합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노래를 이루는 것의 절반은 말이다. 그런데 나머지 절반인 음악도 말과 어우러져야만 좋은 노래가 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노래는 곧 말이요. 말은 곧 노래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한문만이 진정한 글이라고 여겨 말과 글이 서로 같지 않았던 전근대 시대에도 노래는 외국어인 글로는 부를 수 없었다. 그래서 고려 광종조의 고승 균여는 우리말로 <보현시원가> 향가 열한 수를 지었다. 또한 조선 명종조의 석학 퇴계 이황 또한 우리말로 <도산십이곡> 시조 열두 수를 지었다. 조선후기에 많이 지어진 백과사전적인 총서류 저술들에서는 우리말 노래들에 대한 설명 끝에 흔히 훈민정음의 자모 체계에 대한 설명을 덧붙여 놓았다. 노래는 곧 말이요 말은 곧 노래임을 선인들은 알고 계셨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들의 말은 노래가 되고 있는가? 우리가 쓰고 있는 말은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풍부하고 아름답게 표현하여 다른 이들과의 소통과 공감에 이르는가? 요즘 잘 쓰는 말들 중에 ‘헐’이니 ‘대박’이니 ‘쩔어’ 같은 표현들은 긍정적인 경우에나 부정적인 경우에나 다 쓸 수 있을 만큼 의미가 모호하여 지나치게 맥락 의존적이다. 이런 말들은 물론 재미있기도 하지만 정보의 양으로 본다면 사실 단순한 감탄사 이상의 역할을 못 한다. 이런 표현들을 위주로 말을 하다가는 반벙어리 신세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더욱이 문제가 되는 것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각종 혐오성 말들이다. ‘된장녀’니 ‘김치녀’니 하는 여성비하적 표현이 문제가 됐고 이제는 ‘한남충’(한국 남성 벌레) 같은 남성비하적 표현도 생겨났다. 이처럼 특정 집단을 공격하는 표현도 문제지만 어느 경우에나 쉽게 쓰이는 ‘극혐’과 같은 말도 문제다. ‘극혐’은 말 그대로 극도로 혐오한다는 뜻이다. 혐오는 ‘싫어할 혐(嫌)과 ‘미워할 오(惡)’가 합쳐져 이루어진 말이니 이미 그 자체로 강한 부정적 감정을 내포한다. 그런데 ‘극혐’이란 여기에 다시 ‘다할 극(極)’을 붙인 것이니 정말로 강한 증오를 표현한 말이 된다. 문제는 이 같은 표현이 너무나 가볍게 쓰인다는 것이다.

어쩌면 미움은 사랑보다 더 전염성이 강한 듯도 하다.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고 해서 다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 나를 미워할 때 그를 미워하지 않는 것은 성인(聖人)이 아니고서는 하기 어렵다. 설령 당장은 아니라 할지라도, 전염성 강한 미움은 돌고 돌아 언젠가는 다시 최초의 전파자에게까지 이른다. 내가 누군가를 ‘극혐’한다면 나에 대한 그 누군가의 ‘극혐’ 또한 훗날 반드시 내게로 돌아온다. 그러기에 미워하는 일에는 더 신중해야 한다. 때로 미움은 사랑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사랑의 다른 이름이 되기도 하므로,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산다는 것은 어쩌면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이유 없이 던진 미움의 돌은 어느 날엔가는 이유 없이 나에게로 향한 돌이 된다. 이것이 쉽게 증오의 감정을 키우거나 그것을 표현해서는 안 되는 까닭이다.

우리가 과장하는 것은 비단 증오만은 아니다. 애정 또한 우리는 쉽게 과장한다. 어떤 것에 대한 애호를 표현할 때, ‘무척’이나 ‘참’ 같은 표현보다는 ‘과도함’, ‘지나침’의 의미가 담긴 ‘너무’를 일상적으로 사용한 지는 이미 오래다. 요즘에는 이것으로도 부족한지 ‘넘나’(‘너무나’의 준말)라는 말을 만들어 즐겨 쓴다. 이러한 과장적 표현들은 반목과 대립이 난무한 우리 사회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편을 가르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우리는 매순간 무언가는 ‘극혐’해야 하고 무언가는 ‘넘나’ 좋아해야 하는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미워하며 살기보다는 사랑하며 살고 싶어 한다. 아무리 편을 갈라봐야 바이러스처럼 퍼진 미움의 소용돌이 속에서 안전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 점을 생각한다면, 누군가를 끊임없이 ‘극혐’함으로써 자신의 존재 이유를 만드는 것이 어리석은 짓이라는 사실은 쉽게 알 수 있다. 의로운, ‘이유 있는’ 증오는 꼭 필요한 순간에만 쓸 수 있도록 벼리어 두고, 그러한 경우가 아니라면 미움의 씨앗이 나에게서 퍼지지 않도록 오직 말씀과 행동을 삼가야 한다.

노래는 하모니고, 화합이고, 사랑이다. 노래는 곧 말이요 말은 곧 노래임을 알았던 우리 선조들처럼, 노래가 되는 말, 사랑이 되는 말에 우리가 좀 더 귀 기울였으면 좋겠다. 우리말로 시를 짓는 것이 어려웠던 일제 말에도 시인 윤동주는 노래하기를, 사랑하기를, 그리고 부끄러워할 줄 알기를 멈추지 않았다. 저주와 증오의 욕설을 남발할 것이 아니라, 사랑이 되고 노래가 되는 그런 말들을 보다 아낄 줄 아는 우리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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