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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는 여전히 죽어간다
  • 김한글 기자
  • 승인 2016.08.31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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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 죽이기, 로버트 멀리건, 1962.

강간을 하지 않고서 강간범의 누명을 썼다면, 그리고 사회의 프레임으로 인해 당신에게 변명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면 당신은 어떻게 행동할 수 있을까? 책을 원작으로 1962년 개봉된 영화 ‘앵무새 죽이기’를 오늘날 다시 보게 된다면 이런 답답한 상황을 생각해볼 수밖에 없게 만든다.

영화 내의 마을에서는 흑인과 백인이 함께 생활하고는 있지만 흑인들은 같은 인간으로서 존중받기보다 보이지 않는 차별과 억압 속에 생활하고 있는 듯하다. 특히나 영화의 주된 내용인 톰 로빈슨에 대한 재판과정에서 이런 모습은 적나라게 드러난다.

톰은 밭을 일구는 농부였다. 어느날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농사를 짓기 위해 길을 가는 도중 마엘라 이웰이라는 백인여성에게 간단한 집안일을 부탁받게 된다. 하지만 때마침 집으로 돌아온 백인 우월주이자인 마엘라의 아버지가 나타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톰이 집을 떠난 뒤 그는 단지 흑인과 백인이 한 장소에 같이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딸을 심하게 폭행한 것이다. 이후 마엘라는 자신의 아버지와 함께 흑인인 톰에 의해 자신이 폭행과 강간을 당했다고 주장하며 고소장을 제출하게 된다. 그리고 일어나지도 않은 범죄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게 된다.

영화는 이 사건의 변호를 맡은 백인 변호사 애티커스와 그의 딸 스카우트 그리고 아들 젬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정의롭고 옳은 것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던 그는 톰의 변호사로서 재판에 참여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나 그가 변호를 수임한 이후부터 마을에서는 변호를 맡아서는 안된다는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급기야 사람들은 흑인을 변호하는 백인 애티커스를 비난하기에 이른다. 이것에 대해 스카우트는 묻는다. “아빠가 뭘 잘못 했기에?”

▲ 애티커스와 톰이 흑과 백을 나누는 프레임의 한 가운데서 마주하고 있다.

평소 자신의 두 남매인 스카우트와 젬에게 식사예절에서 시작해 사회의 부조리까지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었던 애티커스 역시 스카우트의 질문에는 답하지 못했다. 다만 그 행동이 미국 사회에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는 행동이었기 때문이고, 그 행동 자체가 떳떳한 가장이 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라고 얘기할 뿐이었다.

만약 톰이 흑인이 아닌 백인이었다면 애티커스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부당한 일을 당한 사람을 돕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이것이 떳떳한 가장이 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해줄 수 있는 인물이었다.

피상적인 피부색 하나 때문에 같은 인격을 지니고 같은 생각을 할 수 있는, 같이 살아 숨을 쉬며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생각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은 실로 무서운 일이다. “마엘라가 불쌍해 보였기 때문에 집안일을 도와줬다”고 톰이 말하자 “지금 흑인인 네가 백인 여성을 불쌍하다고 말한 것이냐?”고 반문하는 검사의 모습과 고개를 끄덕이는 판사의 모습에서 사회의 프레임이 대상과 사실관계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쉽게 생각할 수 있다. 당시 미국의 시대상에 따르면 흑인은 백인과 동등하지 않을 뿐더러 백인을 동정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 옛날 있었던 노예제도부터 시작된 흑인에 대한 차별적인 시선이 현대까지 남아 이어지면서 미국내에서 계속해서 흑백갈등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면 한번 형성된 개인의 의식이 변화하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더군다나 프레임은 한 개인만의 생각이 아니라 집단의 생각이 반영되는 보편성을 내포하기 때문에 항상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것으로 치부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변화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비단 1930년대 미국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도, 그리고 우리가 사는 지금도 사회의 기반에는 이를 유지하고 구성하는 프레임이 내제 돼있다. 쉽게 말하는 규범과 전통 그리고 사람들의 의식 기저에 깔린 생각들은 사회가 제대로 움직이도록 만들기도 하지만 반대로 스스로의 행동에 제약을 만들고 타인의 행동을 제한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위와 같은 부정적인 프레임이 존재한다. 분단 이후 ‘반공·종북’은 지금 사회를 이끄는 기성세대의 의식에 강하게 자리잡은 하나의 프레임이다.

6.25 당시 북한의 만행과 현재까지 계속해서 이어지는 도발행위는 분명 우리나라에 대한 위협이다. 때문에 이를 직접 겪은 사람들과 보고 들었던 우리나라 국민들은 북한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반공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을 때부터 나라의 존폐를 위해 선택될 수밖에 없었던 사항이었으며 이후 독재기간 동안 체제유지를 위한 효과적인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민주화 운동의 열기가 뜨거운 시기에 위기를 감지한 독재정권은 분단돼 있는 현실과 이념의 갈등을 이용해 종북이라는 새로운 프레임을 확장시켰고 북한에 대한 범국민적 거부감은 이를 사회 전반에 퍼질 수 있게 만들었다. 문제는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종북’ 프레임을 이용해 정부의 논리를 정당화하는데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사드(THAAD)배치 장소로 성주군이 선택되면서 성주군민들의 반대시위가 시작됐었다.

한·미·중 관계에서 사드가 가지는 파급력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헌법정신에 따르면 사회적 문제에 대해 국민 전체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며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는 것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당연한 행위다. 그러나 이런 행위의 정당성을 얘기하기 앞서 사드 배치 반대 입장을 표명하는 사람들에 대해 박근혜 정부는 ‘외부세력’이라고 규정함으로써 종북 프레임을 이용해 본질을 흐리고 있다.

논란의 핵심은 사드 배치에 반대하는 종북세력이 아니라 사드 배치라는 사실 자체다. 영화 ‘앵무새 죽이기’에서 흑인인 톰은 사건의 본질인 성폭력 행위의 존재 유무가 아닌 피부색의 차이에 기인한 평가를 받아야만 했다. 사회 자체를 지탱하는 거대한 기둥인 프레임을 이용하면 그만큼 사람들의 눈을 가리기 쉽게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 법정에서 톰의 모습은 졸지에 외부세력이 된 국민들의 모습과 유사했다.

지금의 우리나라 역시 마찬가지다. 모든 국민들은 헌법에 명시된 대로 자신의 의견을 표출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런 사람들을 내부, 외부세력으로 이분하는 것은 사회 전반에 퍼져있는 ‘북한에 대한 경계’라는 프레임을 이용해 문제의 본질을 흐리고 정부의 행위타당성에 대한 논란을 피해가고자 하는 의도일 뿐이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애티커스는 딸 스카우트에게 사냥하는 방법에 대해 가르친다. “어치새는 쏴도 괜찮지만, 앵무새를 죽이는 일은 죄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앵무새는 사람들을 기분좋아지게 하는 아름답고 진실된 노래를 불러주기 때문이야” 사회에 이로운 것들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이 말의 요지였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그 말이 가슴에 와닿는 것은 국민의 의견을 ‘외부세력’으로 규정한 채 입을 막고 발언할 기회를 막은 작금의 모습이 앵무새를 죽이는 모습과 겹쳐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강간행위 없이 강간범이 된 톰의 모습과 국민으로써 권리를 행사했더니 졸지에 외부세력이 되는 우리의 현실이 너무나 유사하다. 한국의 앵무새는 여전히 죽어가고 있다.

김한글 기자  petterday@ajo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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