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은 두 이모와 함께 산다. 30대의 나이까지 어긋남 없이 언제나 같은 일상을 반복하는 그에게 있어서 두 이모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다. 아침에 일어나면 정해진 순서대로 샤워를 하고 댄스 교습소를 운영하는 두 이모의 노래를 들으며 피아노 앞에 앉는다. 커튼 사이로 비치는 햇빛을 잠시 감상하고 있으면 올라가는 피아노 뚜껑받침이 그의 얼굴을 그림자로 덮는다.

두 이모는 폴이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되기를 원했다. 아침 연습이 끝나면 ‘슈케트’ 빵집에 들러 아침을 간단히 해결하고 이모가 일하는 댄스 교습소에서 미뉴에트, 왈츠, 자바에 맞춰 조용히 음악만을 연주한다. 일을 하거나 길을 걷거나, 무엇을 하든 폴의 표정은 무표정하며 무료하다.

그는 날마다 악몽을 꾼다. 아직 어릴 때 두 부모를 사고로 잃은 폴은 아빠라는 사람에 대해 무의식적인 거부감을 가지고 있으며 오로지 엄마만을 그리워 한다. 생일 선물로 받은 가족사진에서도 아빠의 사진만을 오려내는데 이는 ‘고상함’을 추구하는 이모들이 원치않는, 레슬링이라는 직업을 가졌던 아빠에 대한 거부감의 투영이 원인일 것이다.

 
 

그의 부모는 폴이 아직 걷기도 전에 폴의 눈앞에서 죽었다. 여기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는 하지만 당시 사건 이후 30여년간 말을 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폴이 가진 트라우마를 보면 기억 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나서 계단으로 걸어다닐 수밖에 없게 된 어느날 폴은 프루스트 부인을 만나게 된다. 자신을 ‘마담 프루스트’로 표현한 그녀는 폴에게 엄마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 그녀가 주는 특별한 차 한잔과 입가심을 할 수 있는 마들렌, 그리고 유년 시절에 들었던 음악이 있으면 기억을 통해 과거를 확인할 수 있다고 전한다.

어느날 문득 잊었던 기억이 떠오르는 것과 유사하게 프루스트 부인이 주는 차를 마시고 마들렌을 한입 베어 먹으면 깊은 잠에 빠지게 된다.(프루스트 부인은 ‘깨어난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때 과거 기억을 떠오를 수 있게 하는 어떤 장치가 필요한데 이 영화의 경우 음악이라는 요소를 추가한 것이다.

마들렌으로 입을 가셔야만 할 정도로 강한 향을 내는 프루스프 부인의 차와 어릴적 들었던 음악은 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었을까.

 

침울했던 하루와 서글픈 애일에 대한 전망으로 마음이 울적해진 나는 마들렌 조각이 녹아든 홍차 한 숟가락을 기계적으로 입술로 가져갔다. 그런데 과자 조각이 섞인 홍차 한 모금이 내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 내 몸속에서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마치 깊은 심연에 닻을 내린 그 어떤 것이 올라오는 것 같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지만, 그것은 천천히 위로 올라온다. 나는 그 저항을 느낀다.... 시간의 추억임이 틀림없다... 그러다 갑자기 추억이 떠올랐다. 그 맛은 내가 콩브레에서 일요일 아침마다 레오니 아주머니 방으로 아침 인사를 하러 갈 때면, 아주머니가 곧잘 홍차나 보리수차에 적셔서 주던 마들렌 과자 조각의 맛이었다. 실제로 프티트 마들렌을 맛보기 전 눈으로 보기만 했을 때에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마도 빵집 진열창에서 자주 보면서도 먹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이미지가 콩브레에서 보낸 나날과 멀리 떨어져 보다 최근 날들과 연결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어느 겨울 홍차에 마들렌 과자를 적셔 한입 베어물었던 그 순간 어린시절 숙모가 내어준 마들렌 향기를 떠올렸고 이를 통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후에 이런 경험에 대해 ‘프루스트 효과’라는 명칭이 붙여지게 된다. 일반적으로 어떤 향기와 관련해 기억이 떠오르는 경우를 많이 겪을 수 있는데 필자의 경우도 목욕탕 스킨 냄새를 맡으면 아직 아버지가 떠오르는 경험을 하고는 한다.

프루스트 효과가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은 논외로 하더라도(이 분야 전문가 레이첼 헤르츠 박사는 이미 이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한 바 있다) 꿈을 통해 과거를 찾게 되는 상황이 폴의 실존을 확인하는 과정을 만들어낸다.

두 이모의 과잉 보호아래 개인이 바라고자 하는 바를 찾지 못한 채 단순한 일상의 반복에 있던 그의 모습은 과거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주체성’을 가지지 못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주체성의 상실은 실존하지 않음과 연결될 수 있다.

그러나 이후 실존주의의 대표라고 볼 수 있는 사르트르의 경우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고 말했다. 이는 인간이란 스스로를 만들어 나가는 존재자로서 그렇게 자신을 이뤄가는 상황이 바로 인간의 ‘상황’이 된다는 주장과 일맥상통하게 된다. 결국 인간의 상황은 최종적으로 인간 자신에 달려 있으며 인간이란 ‘뭔가의 행위를 해나가는 와중에 자기 자신을 이뤄가는 존재’라는 논리로 귀결될 수 있다.

폴이 아무리 자신을 이뤄가는 상황에 소극적으로 대처했다고 할지라도 실존은 본질에 선행하기 때문에 폴이란 인물 자체가 처한 상황 역시 하나의 인간으로 경험하는 실존체로서 경험하는 상황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만난 마담 프루스트는 폴이 자신을 이뤄가는 존재로서 과정을 밟을 수 있는 핵심적인 매개체로서 기억이라는 소재를 사용하게 된다.

폴이 마담 프루스트에게 처음 가져온 것은 유년시절 옆에 있었던 오르골이었고 그가 마신 차의 향기와 함께 유년시절의 경험을 불러낼 수 있게 만드는 기폭제가 된 것이다.

장기 기억, 특히나 걷기도 전에 경험했던 기억들을 냄새와 음악만으로 떠올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지 모르나 우리가 잊었다고 생각했던 기억들이 어느날 문득 떠오르는 것을 보면 이 영화에서 폴이 어릴적 부모님에 대한 기억을 찾는 것이 꼭 불가능하기만 한 것은 아닐지 모른다.

그는 결국, 마담 프루스트의 치료에 의해 아버지에게 느꼈던 거부감은 두 이모가 만들어낸 가짜였고 그가 평생 해온 피아노 역시 두 이모가 만들어 놓은 꿈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과거의 기억을 통해 자신이 30여년간 계속해 온 삶의 시작부터가 가짜였다는 사실을 알게된 순간 그는 스스로가 새로운 삶을 시작할 가능성을 찾게 되는 것이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했던 폴은 불완전한 인간이었지만 잃어 버린 기억과 자신이 받았던 사랑에 대해 확인 하면서 자신을 발전시키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그리고 이는 동시에 폴 스스로가 ‘실존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만든다. 항상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그가 기억을 찾은 뒤로부터 웃음을 머금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영화의 종반부에 도달해 자신의 아이를 보며 말을 걸 수 있다는 사실이 그를 진정으로 실존하게 만든 것이다.

마담 프루스트를 통해 그가 엿본 과거의 기억이 모두 사실인지는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폴이 그녀를 통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았다는 것이다. 그의 잃어버린 시간은 과거의 시간일 수도 있으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잃어 버려야만 했었을지 모르는’ 미래의 시간들이었다. 또한 그의 존재의 이유였다.

영화 진행의 핵심적 역할은 과학적 요소가 작용하기는 했지만 전반적인 내용 자체는 감성에 더 무게를 두고 있는 것 같다. 프루스트 부인의 집에서 나타나는 따듯함과 편안함 그리고 그 속에서 웃음을 찾는 폴의 모습을 보면 ‘치유’라는 것이 꼭 기억 때문만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마담 프루스트를 만났고 폴을 이해해주는 사람과의 대화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었을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폴은 더이상 피아노를 치지 않는다. 평생을 매진했던 피아노를 내려놓았음에도 불구하고 폴의 모습은 평화롭다. 스스로가 실존하는 것에 대한 의미를 찾을 때 그는 비로소 행복할 수 있었고 자신의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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