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행 회의론자이다. 나에게 여행이란 숙박업소에서 고기를 구워먹고 술을 먹다 돌아오는 휴식의 개념이 강하다. 여행을 가서 이것저것 보러가는 다니는 것은 내게 여행이 아닌 고행이라고 생각해왔다. 이번 학보사 여행 사업에 선정된 황선희 학우의 여행 루트를 보고 숨이 콱 막혔다. ‘왜 여행을 가서 힘들게 돌아다녀야 하나’ 라는 생각이 대번에 든 것이다. 

가뜩이나 나는 수원토박이로 살아 이 주변으로는 나가본 기억이 얼마 없다. 굳이 다른 지역을 가볼 필요를 못 느끼기도 했고 ‘어차피 도시가 도시지 뭐’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수원에서 200km나 멀리 떨어지 있는 대구를 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또한 대구를 도착해서도 쉬지 않고 돌아다닐 것을 생각하니 머리가 아찔했다. 

어쨌건 나는 4월30일 아침 7시에 대구로 가는 버스를 타게 됐다. 대구까지 몇 시간을 자야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등골이 서늘했다. 매표소에 카메라를 두고 온 것이다. 이미 버스는 대구로 출발하고 있었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내 것도 아닌 백만원이 넘어가는 DSLR을 분실한 것이다. 부리나케 매표소로 전화해봤다. 전화를 안 받았다. 분실물센터로 전화를 했다. 주말이라 업무시간이 아니라는 ARS음성만 계속하여 들렸다. 고행 길에 오르고 있는 나에게 시련이... 어떡하지라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같이 간 황선희는 이러한 사실을 알지도 못한 채 앞 좌석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마음속에 커다란 짐을 지고 11시36분 대구에 도착했다. 아직 4월말이지만 더위가 몰려왔다. ‘아 내가 이 여행을 잘 마칠 수 있을까’ ‘최소한 1박2일동안 웃을 수 있는 시간이 존재하기나 할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여행의 시작

 
 

황선희의 친구 이혜리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황선희를 맞았다. “밥 먹었어? 일단 밥먹자”라는 말로 여행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밥을 먹은 후 먼저 김광석 거리를 갔다. 대구 중구 방천시장에 있는 김광석 거리는 2010년 가수 김광석을 기리기 위해 조성됐다. 350미터의 길에 김광석의 삶과 노래를 주제로 시(詩)를 비롯한 다양한 벽화와 작품들이 들어서 있다. 우리와 그곳의 사람들 모두는 예술가의 자유를 느끼는 듯 했다. 또한 문명의 발달로 인한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해 주고자했던 김광석의 노래가 떠오르는 시점이었다.

다음으로 대구의 근대골목거리를 갔다. 근대대구는 한국전쟁 당시 다른 지역에 비해 피해가 크지 않아 전시 전후의 생활상이 비교적 잘 유지된 편이다. 골목투어 출발지라는 표지판에서 대구 근대로 향한 발걸음을 시작했다. 제일 먼저 도착한 선교사주택은 1900년 초 미국 선교사들의 사택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동양적인 미와 서양적인 미가 함께 어우러진 모습이 보기 좋았다. 김광석 거리에 비해 사람들이 얼마 없어서일 수도 있겠으나 선교사 주택이 주는 조용한분위기는 마음의 평온을 주기도 했다.

 
 

곧 이어 골목길과 함께 멋들어진 중절모 신사가 그려진 벽화가 눈에 들어온다. 이상화 고택으로 가는 골목길이다. 이상화는 유명한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지은 대구출신 시인으로, 일제 강점기 민족의 아픔과 향토적 세계를 노래했다. 이상화 고택은 현재 많은 보수가 이루어져 낡은 느낌이 잘 살지 않는다. 작은 집에서 조그만 시로써 일제와 투항했던 이상화 그리고 그를 비롯한 독립투사들의 투쟁에 감사함을 느꼈다.

 
 

잃어버린 카메라가 완전히 머리에서 지워진 것은 향촌문화관에서였다. 향촌문화관은 대구 중구 향촌동의 50년대 모습을 재현해 놓은 곳이다. 1950년대 양복을 입어보는 의복체험 이중섭화가의 은지화 그리기 체험 등이 준비돼 있다. 또한 벽에 붙어있는 반공 포스터들은 당시의 상황을 잘 반영한다. 우리나라의 50년대는 정말 우울했다. 6.25전쟁이 일어난 시대기 때문이다. 나는 전시회를 가면 고속버스가 톨게이트를 통과하듯이 하이패스로 지나간다. 하지만 이 향촌문화관의 전시품들은 그렇게 지나가기가 아까웠다. 우울했던 대한민국의 50년대 상황을 전혀 우울하지 않게 그리고 오히려 향토적인 정서를 불러일으키게끔 전시를 해두었기 때문이다. 

다음날인 5월1일에는 마지막 여행지로 금호강 하중도를 갔다. 황선희는 한 블로그에 올라와 있는 하중도의 사진을 보여주며 한껏 들떠 있었다. 사진으로 본 하중도는 유채꽃이 만발해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기대에 부풀어 하중도에 도착했다. 그러나 만발한 유채꽃은 없었다. 버스시간이 촉박하여 먼 길을 마다하고 뛰어갔는데 유채꽃은 없었다. 날씨가 빠르게 더워지면서 유채꽃이 다 지고 만 것이다. 아쉽게도 다음을 기약하며 우린 버스터미널로 가야만 했다.

 
 

모든 여행계획을 마치고 강하게 들었던 생각이 있다. 여행회의론자였던 내가 새로운 여행방식의 즐거움을 조금 더 안 느낌이었다. 걸어 다니는 것은 힘들지만 나또한 친한 친구와 함께라면 휴식하는 의미의 여행이 아닌 새로운 것을 보고 느끼는 여행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의 우정

이 둘은 교환학생시절 핀란드에서 만났다고 한다. 타지에서 생활한다는 것에 걱정도 많았는데 서로 의지할 수 있어서 친해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들은 오랜만에 만나는데도 어색함이 전혀 없었다. 또한 무거운 주제가 아닌 비슷한 주제로 계속 얘기하는 것을 보니 정말 스스럼없는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들의 이야깃거리의 8할은 ▲본인의 체중에 관한이야기 ▲예쁜 연예인의 이야기 ▲맛있는 것이 있는데 먹고 싶다는 이야기이다. 똑같은 주제·이야기가 반복됨에도 이들은 새로운 예시를 제시하며 이야기를 계속해 나간다.

이 세 가지 레파토리를 가지고 이들은 그리고 나는 1만9천4백4십 걸음을 걸었다. 한 걸음을 50CM로 쳤을 때 9.7KM를 걸은 것이다. 여러분들은 9.7KM이 얼마나 먼 거리인지 짐작이 안 될 것이다. 우리 학교에서 수원역까지가 5.82KM이다. 좀 감이 오는가? 행군의 경험이 있는 나도 이렇게 힘든데 그녀들은 전혀 지친기색이 없었다. 어떻게 그 이야기들만 하면서 먼 거리를 걸을 수 있는지 아직도 의아하다. 

이들을 보고 ‘언터처블: 1%의 우정’이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이 영화에서 백인의 장애인(필립)과 흑인의 건달청년(드리스)이 나온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과 나와 같이 여행을 한 이들의 공통점은 좀처럼 만날 수 없는 조합이라는 것이다. 건달행세를 하고 다니던 드리스는 본인이 장애인을 돌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아주대학교의 황선희가 경북대학교의 이혜리를 핀란드에서 만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또한 핀란드로 교환학생을 간 한국대학생들 그 중에서도 서로가 친해질 것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들은 서로를 “못 보면 되게 오래 못 본 것 같은데 막상 보면 어제 본 것 같다”고 말한다. 이보다 친구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 문장이 있을까. 여러분도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친구들이 있다면 아마 1%의 우정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너에게 쓰는 편지

FROM 혜리 TO 써니

핀란드에서 사귄 소중한 인연 써니! 입버릇처럼 한번은 서울에서, 한번은 대구에서 꼭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었는데 정말 이루어질지 몰랐어. 짧은 시간이 야속했지만 정말 즐거웠다. 핀란드 생활의 연장선인 것처럼 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나의 일상 속에 니가 있는 낯섦에 신기하기도 했어. 후덥지근한 대구의 날씨 속에서 한참을 걸으면서 유럽 여행할 때 고생했던 생각도 나고 그러면서도 역시 너랑 함께하는 여행은 즐겁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했어. 다른 지역에 비해 관광할 곳이 많이 없는 대구라지만 아직 너에게 소개해주고 싶은 곳이 너무 많아. 다음에 기자친구랑 또 놀러와! 그 때는 이번이랑 또 다르게 여행해보자~

  

FROM 써니 TO 혜리

대구를 가겠다고 했던 약속이 학보사여행과 함께 이루어져 정말 기쁘다. 아침 일찍부터 버스를 타러 나가야 돼서 힘들었지만 너를 만나러 간다는 생각에 정말 설렜어. 오랜만에 만났지만 마치 교환학생 시절 기숙사에서 만난 것처럼 매우 편하고 익숙했다. 또한 우리 3명이 동갑내기여서 각자 학교생활, 일상, 미래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가 좋았구. 학교생활에 익숙해지고 지칠 무렵, 오랜만에 만난 너와 새로운 장소에서 여행을 한 것은 잊지 못할 추억이 될거야. 항상 보고 싶은 내 친구야 앞으로도 이런 기회가 많이 주어졌으면 좋겠다. 다음엔 너가 서울로 와서 같이 놀았으면 좋겠어.

  

EPILOGUE

여행이 끝나고 황선희는 수원으로 돌아갔다. 나는 카메라를 찾기 위해 동서울로 가야했다. 새로운 여행의 시작이었다. CCTV 확인결과 누군가가 가져간 것으로 판명되어 낙심을 했다. 이틀 정도가 지난 후 한통의 전화가 왔다. 분실물센터였다. 가져가신 분이 분실물센터가 문을 닫아 직접 보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카메라는 다시 찾았다. 

이번 여행에서 카메라 외의 분실물이 있었다.“아 황선희 제발!” 이 말은 황선희가 빵을 택시에 두고 내렸음을 알고 낸 것이다. 황선희는 그렇게도 먹고 싶었던 대구 명물 ‘삼송빵’을 한 보따리나 샀지만 택시에 두고 내리는 바람에 빈손으로 집으로 돌아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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