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라는 이름의 가이포크스의 가면을 썼다 착각하며 뱉어낸 표현은 새하얀 엄지손가락을 향한 물량공세를 만든다. 착각 속에선 상대가 본인의 편이 아니라면 분노의 표출이나 희화화를 통한 조롱을 서슴지 않는다. 마음속에서 닳지 않던 양심의 삼각형이 점차 회전하며 느껴본 적 없던 희열을 맛보자 그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계속해서 대상을 갈구하게 된다. 안타깝게도 약자는 본인에게 가해지는 혐오에 대해서 약자이기 때문에 저항하기 힘들다. 그렇기에 공격의 대상은 점차 약자로 옮겨지며 희열을 위해 무차별적으로 쏘아올린 화살은 사회적 방패가 없는 이들의 가슴에 박힌다.

사회적 소수자인 성 소수자에 대한 무시 발언도, 단식 투쟁을 하고 있는 세월호 피해자들의 부모 앞에서 행하는 폭식 파티도, 아무리 분노해도 대답할 수 없는 고인에 대한 모욕도 본인의 감정표출이라는 자기위안적 논리를 앞세우면 정당화된다. 현실이 아닌 자연 상태를 가정했던 홉스도 울고 갈 이 혐오의 시대에서는 약육강식의 논리에 의해 지배된다. 내 편 아닌 강자에게는 들 수 없던 주먹은 약자에게는 본인 스스로 묶어둔 고르디아스의 매듭이 잘려나가듯 쉽게 움직인다.

모 공중파 코미디 프로그램에 출연해 논란을 빚은 개그맨 장동민은 또 한 번 장안의 화제가 됐다. 다른 사람들을 웃게 하기 위해서라는 명분하에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넘어 이혼가정 아동 조롱이라는 기막힌 아이디어의 향연을 보여준 것에 열띤 박수를 보낸다.

그 혹은 우리가 스스로 한 가지 질문만 해볼 수 있었다면 이 사달이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그 약자였더라도 그런 소재로 사람들을 웃길 수 있었을까? 내가 그 약자였더라도 그런 소재에 웃을 수 있었을까? 내 일이 아닌 것에 쉽게 행동하고 쉽게 반응할 수 있음은 결국 나 아닌 타자에 대한 공감의 부족을 의미한다. 집단의 이익과 조화로운 발전이라는 공동체 의식 따위는 공산주의의 폐해 취급을 받는다. 그렇게 본인의 이기심만 충족시키다 보면 스스로 피해를 보게 된다는 사실은 절대 보지 못한다.

휘두른 주먹은 분명히 내 손에도 같은 충격이 온다. 표면적인 혐오라는 단어에 얽매여서도 안 된다. 타인에 대한 공감이 배제된 행동이 곧 이기심이며 그것이 곧 혐오를 만들어 내는 병폐라는 것을 우리는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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