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KBS 김성수 아나운서의 모습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KBS 김성수 아나운서의 모습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국민의례에 언제나 등장하는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 본 ‘국기에 대한 맹세’의 내용이다. 자주 듣는 목소리기 때문에 그만큼 익숙해지기도 했지만 정작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한다. 바로 KBS 아나운서실장 김성수 동문이다.

 

“대한민국에 탈 배가 없다고”

김성수 아나운서는 지난 30년간 ▲뉴스 ▲스포츠 ▲시사 등 분야에서 아나운서로 활동했으며 PD, 기자 등 일의 경계를 두지 않고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의 능력을 드러냈다. 새로운 도전을 한다는 것이 두렵기도 하련만 그에게 도전이란 한계를 뛰어넘는 계기로써 가치가 있다. “한계에 대한 문제였다. 열심히 하는데 내가 더 성장하지 못하는 것이 스스로 느껴졌다. 일에 대한 권태도 왔었다. 그럴 때마다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가 첫 아나운서 일을 시작할 때였다. 81년 당시 KBS는 정부의 입김이 상당히 강했다. 비단 KBS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방송사가 그랬던 시기였다. 그건 김 아나운서에게도 마찬가지 였다. 국회의원 선거를 방송해야 하는 그에게 말도 안되는 ‘보도지침’이 내려왔다. 소위 말하는 집권 여당에게 후보자 방송의 절반을 내어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후보자가 4명이 나왔다고 하면 방송 10분 중에 5분은 여당 후보를 방송해야 했다. 다시 생각해도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이제 막 언론계에 발을 들인 그는 납득할 수 없었다. 도대체 그런 불공정한 방송이 어디 있냐고 대뜸 선배에게 물었다. “다른 배 타 그럼!” 그에게 돌아온 한마디였다. 그래서 재차 따졌다. “어떤 배를 타야 합니까?” “대한민국에 그런 배는 없다. 탈 수 있는 배가 없다”

80년대는 그런 시대였다. 당시 언론은 하고 싶은 말을 완전히 할 수 없는 그런 구조였다고 한다. 언론계에서 ‘무언가 바꿔보겠다’는 포부를 가진 사회 초년생이 인정하고 받아들이기엔 너무 큰 짐이 아니었나 싶다. “회의감이 정말 많이 들었다. 심리적인 좌절, 무력감 같은 것들이 나를 짓눌렀다” 아마도 당시에 시사, 뉴스 부분이 아닌 FM 음악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된 것도 그런 회의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하나의 몸부림이었을 수 있을지 모른다.

 

“We Want Peace, We Want Justice"

91년 김 아나운서는 미국으로 건너가 기자로 일할 기회를 접하게 된다. 무작정 미국으로 떠난 그는 외국 땅에서 다수가 소수를 짓밟고 억압하는 실태를 적나라하게 경험했다. 그가 도착한 LA에서는 백인과 흑인들의 갈등이 꽤나 심각한 상황이었다. 가장 심각했던 사건은 92년 ‘로드니 킹’사건으로 시작된 LA폭동이었다. 백인 경찰의 폭력에 분노한 흑인들이 인접한 한인타운으로 밀려들어 왔고 그러면서 한인타운 거주자들에게 많은 피해를 입혔다. 이것을 최초로 한국에 보도한 기자가 바로 김 아나운서다. “왜 한국인이 피해를 입었냐고? 그 이유가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다. 흑·백 갈등으로 촉발된 문제를 미국 언론에서 뜬금없이 흑·한 갈등으로 몰고 거였다” 당시 미국 언론은 ‘로드니 킹’사건과 유사한 시기에 발생한 ‘두순자 사건’을 보도하며 흑인의 분노를 백인이 아닌 한인들에게 돌리도록 만들었다. 흑인 거주지와 인접해 있는 한인 거주지의 피해는 당연히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LA 라디오코리아에서 뉴스를 진행하고 있던 그는 미국 언론의 행동을 보면서 언론인으로서 자신의 사명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다고 한다. “첫째로 흑·한간의 갈등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긴급한 상황 속에서 하루 종일 마이크를 잡았다. 언론인으로써 사명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위험한 상황이 있으면 라디오를 통해 알렸고 어떻게 한국인을 도울 수 있을까 생각했다. ‘평화 대행진’을 기획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나는 언론인이니까. 여론을 형성할 수 있는 일이 뭘까 생각했던 결과가 바로 그거다” 김 아나운서는 그날 오전 방송을 통해 “오후 2시까지 아드모어 공원으로 모이자”고 전했다. ‘작은 움직임이라도 시작해보자’는 뜻에서 시작한 시위에 1천명이 넘는 한인들이 모였고 다음날에는 만명이 넘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10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아드모어 공원으로 쏟아져 나왔다. 밤을 세워 준비한 ‘We Want Peace, We Want Justice'라는 현수막과 함께.

“그때가 돼서야 미국 언론에서도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 너무 많은 피해가 있어 가슴이 미어졌다” 시위가 끝이 나고 아드모어 공원에서 장례식이 열렸다. 많은 피해가 있었지만 그 중에도 가장 슬펐던 것은 어린 나이에 한인타운을 지키기 위해 나섰던 이재성군의 죽음이었다. “정말 많이 울었다. 먼 타국까지 와서 고생하는 사람들, 말도 안되는 것으로 욕을 먹고, 재산도 잃은 사람들을 보며 이게 맞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장례식을 방송으로 전달한 후 김 아나운서는 ‘손에 손잡고’를 선곡했다. “그때는 정신없이 틀었던 노래였는데 타국에서 고생했던 한인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던 것 같다. 그 일을 계기로 ‘손에 손잡고’는 한인타운의 상징처럼 쓰이게 되었다” 정말 힘든 시간이었지만 그만큼 보람되는 시간이었다고 그는 전했다. 인생의 큰 의미를 가지는 사건이었고 그 일을 계기로 스스로가 많은 것이 변했다고.

 

김성수 아나운서가 신입 아나운서 교육을 하고 있다.
김성수 아나운서가 신입 아나운서 교육을 하고 있다.

“아나운서는 아나운서의 길을 걸을 때 가장 행복하다”

김 아나운서는 KBS로 복직을 포기하고 퇴직금을 정산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미국에서 참 많은 일들을 겪고 나니까 정이 많이 들었다. 그래서 사실은 다 정리하고 미국에서 살까 하는 생각이 있었다” 사직서를 준비하고 있는데 갑자기 당시 KBS 홍두표 사장이 김 아나운서를 따로 불르더니 대뜸 “‘안녕하십니까 봉두완입니다’라는 프로그램을 딱 6개월만 맡아달라”고 했다. 아마도 미국에 있을 당시 김 아나운서의 활약을 눈여겨봤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나 할 수 없는 것을 해낼 수 있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대로 사직서를 제출할 수도 있었겠지만 PD라는 새로운 영역에 대한 호기심이 그의 발걸음을 돌려놓았다. 회사를 그만두려던 그는 졸지에 PD가 됐다. 6개월만 하려던 방송은 연이어 있는 국회의원 선거와 대통령 선거를 겪으면서 인기 있는 KBS 시사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았다. PD의 자리에서 수년을 보낸 김 아나운서는 2000년부터 다시 아나운서로 복귀했다. “너는 왜 방송 안하냐? 하는 얘기에 방송이 문득 다시 하고 싶어졌다. 참 길게 돌아왔는데 아무래도 마이크를 직접 잡는 것이 가장 좋았던 것 같다. 아나운서였으니까”

다시 시작한 아나운서의 길은 전과 달랐다. 바로 스포츠 전문 아나운서가 된 것. 방콕 아시안 게임 골프 캐스터를 시작으로 수영, 육상 등 스포츠 중계를 시작하게 됐다. 그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 개·폐막식을 단독으로 중계한 이후 ▲토리노 ▲베이징 ▲런던 올림픽까지 굵직한 행사를 담당했다. “아테네 올림픽을 중계할 때 참 준비하면서 힘든 점이 많았다” 올림픽은 개회식 직전까지 행사 내용이 공개되지 않는다. 그래서 김 아나운서는 그리스의 역사부터 신화, 출전 200개국의 정보를 사전에 미리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개회식 준비하는데 한 달이 걸렸다. 정말 힘들었는데 그만큼 뿌듯하기도 했다” 아나운서 외의 다른 길을 걷기도 했지만 역시 아나운서는 아나운서의 길을 걸을 때 가장 행복한 것 같다. 올림픽과 관련된 주제로 인터뷰를 진행할 때 그의 표정이 가장 밝아졌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내가 수영을 중계할 때 박태환이 중학교 3학년이었다. 플라잉 실격을 당했을 때. 경기 끝나고 2시간 동안 화장실에서 혼자 울었다고 하더라. 너무 안타까웠다” 매년 국내·외 수영 경기를 중계하던 그는 박태환의 성장하는 모습을 쭉 지켜봤다고 했다. 박태환의 아테네 올림픽 실격패는 그만큼 김 아나운서의 마음을 아프게 했었다. “그런 친구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다. 국민들이 내 목소리를 듣고 있었고 한국 수영 사상 첫 금메달이 나왔다. 정말 잊지 못할 기억이었다” 올림픽 수영경기가 있을 때 1백개가 넘는 나라들이 각기 다른 언어로 중계를 하게 된다. 수영장의 크기가 한정되어 있다 보니 다른 중계석에서 해설하는 모습들도 한눈에 보인다. “박태환 경기 때는 중계가 아니라 응원을 했던 것 같다. 내가 너무 흥분했는지 다른 중계석에서 우리 중계석만 쳐다봤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금도 이처럼 흥이 나서 말을 하는데 경기 당시 그 자리에서는 오죽했으랴. 그만큼 아나운서의 일에 열정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방송은 가슴으로 하는 거야”

인터뷰를 위해 KBS를 찾았을 때 김 아나운서가 신입 아나운서들을 교육하며 꺼낸 말이다. “아나운서라고 하면 말을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다들 생각한다. 그런데 더 중요한게 있다” 말을 하는 직업인만큼 타인의 말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진실해야 한다. 인간적이어야 한다. 그가 지금껏 방송인으로써 가져온 신념이다. “난 내 능력이 특별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여러 면에서 능력을 보여준 김 아나운서가 하기엔 지나치게 겸손한 말일지 모르지만 그런 말을 꺼내는 그의 모습은 사뭇 진지했다. “항상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보니 더 노력하고, 더 절실할 수 있었고 진실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나운서로 입사한 뒤 방송기자가 되고 또 다시 PD의 일을 하는 것들이 말로 뱉어내기는 쉬울지 모르지만 그 뒤로 숨죽여 노력했던 시간이 얼마나 많을지 쉽사리 짐작이 가지 않았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저 열심히, 그 일에 미쳐서 하다보면 꿈은 이뤄질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학창시절 김 아나운서는 학내 방송국 활동에 매진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학교에 공부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방송국 활동을 하러 다녔던 것 같다. 정말 열심히 했다. 우리 학교 학우들도 그 정도로 좋아하는 일에 꼭 미쳐서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제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김 아나운서에게 또 다른 도전을 준비하고 있냐고 물었다.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기회가 된다면,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시 도전하고 싶은 생각을 가지고는 있다” 이젠 아나운서실장으로 같은 아나운서 후배들을 교육하는데 힘을 쏟고 있는 그에게 배울 수 있는 사람이 문득 부러워졌다. 말이 아닌, 가슴으로 가르치는 선배가 있다는 사실이.

 

김성수 아나운서 약력 :

-70년 아주대 산업공학과 입학

-81년 KBS 공채 8기 아나운서

-92년 LA폭동 최초보도

-토리노, 아테네, 베이징 올림픽 중계

-11년 KBS 아나운서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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