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은 그런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모든 내막을 알게 된 후 딸은 어머니의 소원대로 입국 금지가 된 북한에 어머니의 유골을 묻을 언젠가를 그려본다.

‘수프와 이데올로기’ 속 어머니는 제주도 4.3사건의 생존자다. 일제강점기와 4.3사건으로 인해 진정한 고향을 잃어 가본 적 없는 북한을 마음의 고향으로 삼는다. 그 후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활동을 시작해 김일성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딸을 제외한 세 아들을 모두 북으로 보낸다. 하지만 클래식을 즐겨 듣던 장남은 북한에서 음악을 뺏겨 우울증으로 세상을 떠난다. 평생을 밤낮없이 일해 북한에 보낸 가족들에게 돈을 부쳐보지만 무엇도 변하지 않는다. 그녀의 내면에는 여러 나라의 국기가 얽히고설킨다.

어머니는 사위로 일본인과 미국인은 절대 안 된다고 말한다. 어린 시절 일본에서 황국신민으로 살다가 미국 대공습으로 제주도로 건너간 경험 때문이다. ‘빨갱이’가 된 마을 사람들의 피로 붉게 물든 냇물을 잊을 수 없는 어머니는 남한마저 등진다. 결국 국가 이념의 충돌은 북한을 지상낙원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어머니의 선택은 진정으로 원한 것일까. 그녀는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한다. 어머니는 세월이 흐른 후에도 제주도 4.3 사건을 언급할 때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된다. 끔찍한 일이 벌어져'"라고 말한다. 딸이 이제는 괜찮다고 해도 어머니는 그 말을 진정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치매가 온 어머니는 매일같이 북에 보낸 가족들의 이름을 부르며 어디 갔냐 묻는다. 결국 가족의 해체는 어머니의 선택이 아닌 이데올로기의 산물이었다.

지금의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다. 세대와 젠더 그리고 지역 등 수많은 갈등이 충돌한다. 하지만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누는 혐오 사회를 진정으로 원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스스로 선택한 것일까 아니면 짜여진 충돌에 스스로를 대입하는 것일까. 무수한 배제를 일으키는 혐오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

어머니는 그런 딸을 이해한다. 딸이 하필 일본인 사위를 데려왔다. 일본인은 절대 안 된다고 할 줄 알았던 어머니는 정성 들여 수프를 끓인다. 일본인 사위는 가족이 되기 위해 김일성의 초상화가 걸린 집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간다. 세 사람은 한 식탁에 마주 앉아 각자의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를 수프에 녹여 ‘식구’가 된다. 북한을 칭송하는 노래를 밤마다 부르던 어머니는 일본인 사위와 함께 제주도 4.3 사건 70주년 추념식에 방문해 모르는 애국가를 어렴풋이 따라부른다. 어머니가 내면의 충돌을 극복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저작권자 © 아주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