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앗쭈양에게 휴일이 찾아왔다. 다음 주까지 제출해야할 과제가 있지만 오늘만큼은 쉬고 싶다.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시작을 해야 하는데 웬일인지 앗쭈양은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결국 쉬기로 마음먹고 과제를 하지 않는 앗쭈양. 하지만 마감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과제는 자꾸만 앗쭈양의 눈앞에 아른거린다. “과제는 내일부터 하자. 내일부터 해도 늦지 않아”

과연 앗쭈양은 어떤 하루를 보냈을까? 예상과 달리 그녀는 괴로움 속에서 토요일을 마치고 말았다. 이유는 바로 그녀가 ‘과제’라는 프레임 속에 갇혀있었기 때문이다. 과제를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지만 결국 과제를 벗어나지 못한 앗쭈양. 도대체 프레임이 무엇이기에 앗쭈양은 이토록 괴로운 주말을 보낼 수밖에 없었을까?

 

문제는 프레임이다
프레임이란 생각의 틀이라는 뜻으로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함에 있어 그 생각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기준점과 판단형식을 말한다. 프레임을 생각 구조에 처음 가져온 것은 조지 레이코프다. 그는 프레임에 대해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형성하는 정신적 구조물이다”라고 말한다. 그의 유명저서 <코끼리는 생각하지마>는 프레임이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 계획, 행동하는 방식을 결정하는 생각 구조라 말하며 그 중요성을 강조한다.

 

코끼리는 생각하지마
만약 누군가 당신에게 ‘코끼리를 생각하지마라’라고 말하면 당신의 머릿속에는 자연스럽게 ‘코끼리’가 떠오를 것이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칠수록 코끼리는 더욱 선명해 진다. 이렇게 상대편의 프레임을 단순히 부정하는 것은 단지 그 프레임을 강화할 뿐이다.

또 다른 예시를 살펴보자. 누군가가 ‘진영의 논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라는 주장을 할 때 여기서 우리는 ‘진영의 논리’라는 프레임에 갇히게 된다. 진영의 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우리는 ‘진영’이라는 것을 떠올리는 것이다. 이 역시 앞선 예시와 마찬가지로 결국은 진영에 대한 프레임을 강화시킬 뿐이다.

 

프레임과 은유
이러한 프레임 구축에 있어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언어적 지식은 ‘은유’다. 프레임이라는 생각의 틀이 언어와 결부되는 이유는 언어가 곧 생각의 구조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 칭했다. 단순히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언어가 아니라 언어 자체가 생각의 구조를 결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언어를 쓰느냐는 곧 어떤 생각의 구조를 갖고 있느냐는 사실과 결부된다.

언어학적으로 은유는 ‘생각의 구조’라는 깊숙한 영역에서 설명된다. 은유(Metaphor)는 어원적으로 살펴보자면 Meta와 Phora는 모두 운동하다, 이동하다의 뜻으로,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의 이동’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은유는 생략된 직유로서 전혀 닮지 않은 것들 속에서 닮은 점을 직관적으로 느끼는 것이다. 조지 레이코프와 마크 존슨은 저서 <삶으로서의 은유>에서 인간의 사고 체계에서 많은 부분이 근본적으로 은유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은유가 단순히 언어 표현의 문제가 아니라 사고 차원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들은 문학이나 수사법으로서의 은유와 구별되는 개념적 은유를 만들어 이를 ‘한 개념적 영역을 다른 개념적 영역에 의해 인지하는 개념화 장치’라 정의한다.

우리가 은유로 사고하고 있다는 것의 가장 대표적인 예시는 바로 ‘시간’이다. 시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이지만 우리는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이에 우리는 시간에 대해 은유적으로 사고한다. 흔하게 시간은 돈으로 많이 변환된다. “시간을 아껴 써야지”라는 말에는 ‘시간은 돈’이라는 은유가 함축되어 있다. 이 외에도 ‘시간이 흐른다’ ‘시간이 갔다’등의 표현 모두 시간을 어떤 흐르거나 움직이는 존재로 비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은유는 자연스럽게 어떤 ‘전제와 함의’를 만들어 낸다. 이는 사고의 영역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이지만 무엇보다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는 기제다. 전제를 가장 기본적인 사고의 영역에서 은밀하게 주지할 수 있는 언어적 용법이 바로 ‘은유’인 것이다.

 

정치와 프레임
프레임은 주로 정치, 언론분야에서 많이 쓰이는 용어다. ‘정치는 프레임 싸움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프레임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야 하는 정치 분야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전략이다. 앞서 언급한 조지레이코프의『코끼리는 생각하지마』는 ‘미국 진보세력은 왜 선거에서 패배하는가’라는 주제로 보수당이 무의식적으로 시민들에게 어떤 프레임을 제시하는지 잘 보여준다. 우리나라 역시 여당인 새누리진영에서 자신들의 프레임을 여러 방향으로 구축하고 있다.

 

<새누리당 현수막>

세월호 책임을 대통령에게 돌리고,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종북·좌파 세력들 철저히 막겠습니다

 

<4월 8일 새누리당 前원내대표 유승민의원 연설>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국가안보를 지키는 것이 보수의 책무이듯이, 내부의 붕괴 위험으로부터 공동체를 지키는 것도 보수의 책무입니다.

 

 

새누리당의 대표적인 프레임으로 ‘종북·좌파’ 구도가 있다. 진보정당은 북한과 친밀하다는 틀을 만들어내고 반새누리당의 존재들을 종북·좌파라는 언어를 통해 대한민국을 붕괴시킬 수 있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유승민 前 원내대표의 연설에서 알 수 있듯, 보수당은 ‘우리를 지키는’ 정당이라는 프레임을 구축하게 한다.

반면 새정치민주연합(이하 새정연)은 이런 프레임 구축에 실패하고 있다는 입장이 다수다. 새정연이 선거에서 계속 패하는 이유에 대해 새정치연합 민주정책연구원 우석훈 부원장은 “프레임 구축의 실패다”라고 말한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개정판 출간 기념 토론회에서 그는 새정연의 과학적 프레임 구축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대표적으로 새정연 의원들이 사용하는 ‘서민’이라는 용어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에 따르면 ‘서민을 행복하게 해드리겠습니다’라고 새정연에서 이야기하면 듣는 시민들은 기분이 나빠져 조금 더 품격 있는 정당을 지향하는 곳을 지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흔히 길을 가다가도 새정연의 현수막에서 ‘박근혜 심판’이라는 단어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이 역시 자신들만의 프레임 구축에 실패하고 오히려 여당의 이미지를 강화시키는 역할을 할 뿐인 것이다. 자신들의 입장을 어필해야 하는 공간에서 새누리당을 오히려 강조하는 효과를 보이는 것은 프레임구축에 실패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우리는 어떤 프레임 속에서 살고 있나
프레임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무엇보다 강력하게 우리를 좌우 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미디어의 홍수 속에서 흘러넘치는 많은 주장과 명제 안에서 살아가고 있기에 우리는 그것이 어떻게 구축된 것인지 긴밀하게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과연 어떤 사회에 살고 있는지 알고 싶다면 우선 사용하는 말들을 살펴 어떤 프레임 속에 있는지 생각해보자. 우리 사회가 쓰는 은유와 무심결에 전제하고 있는 함의들을 낯설게 바라보며 그 틀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면 적어도 앗쭈양은 과제라는 생각 자체를 그만해야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 수 있지 않았을까.

저작권자 © 아주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