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소성 하에서 자원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 이는 경제학원론에서 현대 경제학을 설명할 때 널리 쓰이는 정의다. 라이오넬 로빈스(이하 로빈스)는 1935년 저서 ‘과학으로서 경제학의 속성과 중요성’을 통해 이 정의를 내렸다. 그간 로빈스는 ‘현대 경제학의 정의를 내린 학자’ 이상의 의미로는 국내에 알려지지 않았다. 우리 학교 이규상(경제) 교수는 이 점에서 착안해 2019년 ‘과학으로서 경제학의 속성과 중요성’을 번역하며 로빈스가 경제학을 희소성 하에서 선택의 문제로 정의한 맥락을 연구했다. 이 연구 이후 신자유주의를 연구하던 이 교수는 로빈스가 초기 신자유주의 주요한 학자 중 한 명이었음을 알고 올해 ‘로빈스, 신자유주의 질서를 구현하는 연방제 유토피아를 그리다’ 논문을 집필했다. 이 교수는 논문에서 로빈스의 1937년 저서 ‘경제계획과 국제질서’의 내용과 집필 맥락을 재구성했다. 이를 통해 로빈스의 사상과 1930년대 경제학사에 대한 이해를 도모했다.

자유주의의 위기, 케인스와의 정면충돌과 좌절

1930년대는 고전적 자유주의가 벼랑 끝으로 내몰린 시기였다. 빈부격차가 심화됐으며 한 나라의 위기는 곧장 다른 나라의 위기로 이어졌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대두되면서 민족국가의 중요성이 다시 강조됐다. 대공황의 발생은 보호무역으로의 전환에 기름을 부었다. 이 교수는 이 시기의 흐름을 “신종코로나바이러스 19 팬데믹이 발생했을 때 전 세계가 국경을 걸어 잠궈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 것과 유사하다”고 설명했다.

영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영국의 대표 경제학자인 케인스도 이때를 전후해 자유주의를 옹호하던 입장을 버릴 만큼 자유주의의 위기는 거셌다. 1930년 영국에서 케인스를 중심으로 경제 위기 해결을 위한 자문 위원회가 구성됐다. 위원회가 내놓은 결론은 관세 부과와 공공사업 추진이었다. 이를 통해 기업과 공공의 투자를 늘려 생산과 고용을 확대하고자 했다. 로빈스는 위원회 구성원 중 유일하게 이를 반대했지만 결국 위원회의 입장은 받아들여졌다.

로빈스와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경제학자들이 모여 ‘관세: 옹호에 대한 점검’을 내놓아 관세 옹호론에 맞서 자유주의를 지키고자 했지만 고전 자유주의 모델을 옹호하는 데만 집중한 탓에 경제학자들의 혹평을 받았다. 한편 1933년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국제자유주의에 반하는 입장을 발표하고 케인스 또한 국제자유주의와 완전히 결별하면서 자유주의의 쇠퇴는 완전한 시대의 흐름이 됐다.

자유주의를 지키기 위한 쇄신, 국제연방제

로빈스는 자유주의를 지키기 위해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이 교수는 “로빈스는 사람들이 생각에 좌우되지 않는 자유무역 시스템을 만들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이는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이 간과한 부분을 보완해 새로운 자유주의 모델을 내놓자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그는 1차 세계대전 이전의 고전적 자유주의자들도 시장이 자생하지 않으므로 민족국가 단위에서 사회적 계획을 통한 시장 형성 및 질서 확립이 중요하다는 점을 잘 파악했으나 이 논리를 전 세계로 확대하지 않은 점을 지적했다. 덧붙여 일부 학자들에 의해 자유주의가 무정부주의의 변종으로 취급되게 한 점 또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로빈스는 초국가적 권위체를 만들고 민족국가들로부터 주권과 전쟁을 일으킬 권리를 가져와 시장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데 있어 민족국가의 영향을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초국가적 권위체의 형태가 통일 국가여서는 안 된다고 못박았다. 통일 국가가 탄생할 경우 정당하지 않은 강제력이 민족국가에 행사될 우려가 있다는 것이 그 이유다. 이러한 우려를 제거한 초국가적 권위체의 모델로 그는 국제연방을 제시했다. 이 교수는 “로빈스는 연방 헌법에 각국이 전쟁할 수 없도록 하고 자유무역을 위협할 수 없도록 규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를 토대로 전 세계적인 교역과 투자 그리고 이민의 자유를 보장하는 사회 제도는 국제 연방 차원에서 만들고 관리하게 된다. 그리고 민족국가는 시장 실패의 수정과 관련된 일인 빈곤 구제와 교육 등을 담당하게 된다. 이 교수는 이를 이해하기 위한 예로 미국을 꼽았다. “미국도 주마다 자치권이 있지만 연방을 만들면서 연방이 주를 제약할 수 있는 권리를 넘긴 것을 생각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국제연방제의 전제로 전 세계 모든 소비자가 시장의 주권을 갖는 것을 꼽았다. 소비자주권을 통해 자유무역을 방해하는 민족국가의 주권이 부정되고 국제연방이 형성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소비자주권 하에서 사회가 해야 할 일은 소비자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이다”며 “이를 위해 자원을 가장 효율적으로 배분할 수 있는 시장을 전 세계 단위로 확대하는 것이 로빈스의 생각이다”고 말했다.

로빈스는 국제연방제의 또 다른 전제로 사유재산제를 꼽았다. 사회 체제가 공산주의로 넘어가는 것을 막으면서 효율적인 자원 배분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사유재산제가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그는 생산요소의 소유권과 사용을 통해 발생하는 소득에 대한 소유권이 보장돼야 생산요소의 효율적 배분을 가능하게하는 유인이 작동한다고 주장했다.

로빈스의 자유주의 사상과 현실 참여 주의

로빈스가 케인스주의에 대항해 신자유주의적 모델을 끝까지 주장한 밑바탕에는 그의 자유주의 사상과 현실 참여 주의가 있다. 그는 강한 자유주의 성향을 지닌 아버지와 친지들 밑에서 자라며 자유주의 성향을 당연시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장교로 복무하던 그는 러시아 혁명을 전후해 사회주의로의 이념적 변화를 경험했다. 제대 후 1920년 대학에 입학한 그는 좌파 정치철학자 라스키의 지도로 정치사상사를 공부하며 사회주의와 완전히 결별했고 자유주의자로서 정체성을 확립했다.

그는 현실 참여를 중시하는 학자였다. 그는 ‘과학으로서 경제학의 속성과 중요성’에서 “경제학자라면 윤리적 문제에 대해 넓고 깊게 사고해야 한다”며 자신의 신념을 밝혔다. 그의 현실 참여 사상에 대해 이 교수는 “로빈스는 정부에서 경제와 관련한 일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이었다”며 “현실 참여를 굉장히 많이 하다 보니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과 같이 자신의 사상을 집대성한 책을 못 쓸 정도였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사회과학을 하는 사람들은 염세에 빠지지 말고 끊임없이 사회 현상에 대한 대안을 상상해야 한다”며 “지피지기 백전불태의 자세로 철저히 연구할 때 대안이 나올 것이다”고 말했다. 한 사람이 살아간 시대와 그의 사상을 연구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출처 = https://www.flickr.com/photos/lselibrary/398365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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