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도피성 동물이다. 힘든 상황이나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어디론가 도피하는 것을 택하기도 한다. 마음의 안정을 찾는데 꽤나 효과적이기 때문일까? 잠수 이별이나 범죄자의 해외 도피와 같이 극단적인 도피는 아니더라도 알게 모르게 다양한 방법으로 도피처를 찾는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장 28절에 나와있듯 우리는 도피처 중 하나로 종교를 택하기도 한다. ‘파이 이야기’의 주인공 파이는 태평양에서 조난을 당해 ▲얼룩말 ▲오랑우탄 ▲하이에나 ▲호랑이와 함께 표류한다. 식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얼룩말과 오랑우탄 그리고 하이에나가 차례로 죽어 나간다. 결국 구명보트에는 파이와 호랑이만 남고 긴장 속에 대치하며 2백27일을 표류한다. 기독교와 이슬람교 그리고 힌두교까지 3개의 종교를 믿던 파이는 오랜 기간 표류해 지치고 힘든 상황에서 세 명의 신에게 기도하며 도움을 청한다. 여러 종교에 의지하는 파이의 모습은 물러설 곳 없는 한계 상황에서 도피처로 종교를 찾는 인간의 본능을 보여준다.

기억을 왜곡해 스스로 도피처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호랑이와 대치하며 표류하던 파이처럼 우리는 끊임없이 경쟁하는 사회에서 긴장 속에 살아간다. 각박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스스로를 속인다. 처한 상황이나 경험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나름대로 포장해 받아들인다. 흔히 부모들이 “우리 아이는 그런 애가 아닌데”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그 예다. 이렇게 우리는 주변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자신이 이해하고 싶은 방향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파이 역시 그랬다. 사실 파이는 동물이 아닌 사람들과 표류했었다. 선원 한 명과 엄마 그리고 주방장과 함께한 표류기를 각각 동물로 치환해 설명한 것이다. 엄마를 눈앞에서 잃은 기억과 주방장을 살해한 기억 그리고 식인의 기억까지 동물 이야기로 포장하지 않고는 버티기 어려웠을 것이다.

책의 마지막에서 파이가 자신의 경험을 온전히 고백한 뒤에 호랑이의 눈앞에서 파이가 사라진다. 살아남기 위해 다른 이를 죽이고 견제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 파이가 경멸하던 호랑이가 사실 파이 자신이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결국 도피는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도망이다. 이상향과 본래 모습 사이에서 오는 괴리감에 힘들어하다 결국 스스로를 부정하기에 이른다.

당장 마음의 안정이 필요하다면 잠시 도피해 쉬어도 좋다. 그런데 현실을 왜곡하고 종교에 기대 표류한 파이의 2백27일은 행복했던가? 파이가 자기 자신과 함께한 기약 없는 표류는 끝없는 내적 갈등을 보여준다. 아무리 외면하려 해도 마음 한켠에서 괴로움은 지속된다. 오랜 표류 끝에 파이가 현실을 직시하고 도피를 멈춘 것처럼 잠시 현실을 피해 도망치더라도 스스로를 잃기 전에 돌아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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