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파냐와 아스테카 이야기는 16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부 멕시코 지역 정치 지도자인 목테수마는 영토확장을 위해 떠난 에스파냐인 코르테스와 만난다. 목테수마는 코르테스의 꾀임에 넘어가 나라를 약탈당하고 코르테스가 아스테카를 지배하게 된다.

표준적인 유럽 중심 정복사에선 16세기 초 에스파냐의 아스테카 정복은 소수의 영웅이 고도화된 군사력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이뤄낸 성과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고 화려함 속에 추악한 면모가 내재돼 있다. 최근 영국 출신의 역사가 메튜 레스털을 포함한 많은 학자들은 역사를 재정의 하는 수정주의적 연구를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최근 우리 학교 박구병(사학) 교수는 ‘16세기 초 에스파냐인들의 아스테카 정복의 역사 다시 쓰기’를 집필해 에스파냐의 정복 이야기를 비평했다.

 

전통적 아스테카의 정복 서사: 신화와 뒤섞인 역사

코르테스와 프란시스코 로페스 데 고마라 등 정복의 승리자들이 작성한 문건에는 에스파냐 문명의 지적 능력과 물리적인 뛰어남 그리고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열등성이 강조돼 있다. ‘멕시코 정복의 역사’는 그들의 ▲기술적 ▲도덕적 ▲정신적 ▲지적 자질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다고 단언한다. 이 사료에서는 목테수마의 애매한 처신과 코르테스의 유능함을 강조한다. 특히 코르테스는 임기응변에 능하며 그의 정보와 지식 덕에 제국 권력의 정복을 이끌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박 교수는 ”영혼 정복의 불가피성과 그 과정의 신속성을 강조해 승자의 관점을 요약했다”고 밝혔다. 또한 정복자들의 시각에만 근거한 신화적인 서술과 엄밀한 평가와는 거리가 먼 변별적인 대비가 되풀이됐다고 말했다. 란세오메도스 유적에 따른 바이킹의 존재 그리고 유럽 민족의 구설을 통해 콜럼버스가 유럽 최초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자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쟁점 1. 코르테스가 목테수마를 인질로 붙잡고 있었다는 것이 사실일까? 

전통적인 에스파냐의 서술에서 코르테스는 목테수마에게 국가의 통치권을 쉽게 내준 멍청하고 순종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하지만 박 교수는 코르테스와 목테수마의 화합 과정에 있어 의문을 제기했다. 특히 목테수마의 항복 연설에서 드러난 존대법과 후한 선물 그리고 숙박시설의 제공은 복종의 의미가 아니라 말하는 자의 신분이 더 높음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또한 전시 상황 중 자유롭게 이동하고 시찰하는 목테수마의 행동을 보았을 때 그의 체포와 억류에 관한 서술은 다소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그는 ”에스파냐인들이 전통적으로 목테수마가 수동적이라고 주장했다”며 “원주민의 서술도 그들의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프랑스 역사가 세르주 그뤼진스키도 목테수마의 항복이 전적으로 신뢰하기 어렵다고 평가했다. 비에야 또한 그의 항복 연설을 코르테스에 의한 ‘역사적 복화술’로 규정했다.

 

쟁점 2. 목테수마와 아스테카인들은 신화속 인물인 ‘케찰코아틀’의 귀환을 굳게 믿었을까?

전통적 서술에서는 목테수마와 아스테카인들이 케찰코아틀의 귀환을 굳게 믿었다는 설명이 등장한다. 이에 대해 박 교수는 이는 목테수마의 죽음과 종전 30년이 지난 뒤에 나온 ‘손질된 신화’라고 말했다. 그리고 수도사 프란시스코 데 아길라르의 “아스테카인들이 수염 나고 무장한 이들을 예언자로 믿었다”는 말에 주목했다. 박 교수는 “이야기가 퍼지면서 목테수마의 항복을 보강하는 예언으로 변주됐을 것이다”고 추정했다. 또한 이러한 영향 아래 피렌체 고문서도 예언의 역할과 목테수마의 믿음이 강조됐다. 그는 “수도사 외에도 원주민들의 영향도 크다”며 “그들은 패배한 군주에 대해 좋지 않은 평가를 내린다”고 말했다. 즉 위의 사료들은 원주민들이 서양에서 온 정복자를 신화적 인물로 섬기고 침략을 정당화하는 전통적 유럽중심 이해의 핵심적인 근거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쟁점 3. 정복의 주도자는 과연 누구일까: 에스파냐인과 틀락스칼테카인

본래 아스테카와 틀락스카얀은 원수지간이다. 2백여년 간의 ‘꽃 전쟁’은 절대로 극복할 수 없는 악감정을 형성시켰다. 한편 코르테스는 두 민족의 대립을 교묘하게 이용하며 틀락스칼테카인과 연합해 아스테카를 정복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주도한 전쟁인 것일까? 박 교수는 전쟁의 성격과 주도권에 대한 기존 인식의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1521년 도시를 뜻하는 알테페틀에 모인 원주민 전사들은 에스파냐인보다 2백배 많았다. 또한 틀락스카얀의 경쟁 세력을 공격한 ‘촐룰라 학살’에서도 에스파냐인들은 정복을 주도하지 못했다. 한편 틀락스칼테카인들이 남긴 화폭에는 스스로를 정당한 자격의 정복자로 부각시켰고 에스파냐인은 필수적인 협력자이자 선한 그리스도교인으로 묘사된다. 그는 “4백여 명에 불과한 이들의 도전과 모험으로 보기 힘들다”며 “오랜 세월 동안 에스파냐인들이 자기 중심적으로 쓴 이야기에 빠져 당시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를 크게 오해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동아시아사의 수정주의적 접근       

수정주의는 일반적으로 역사학과 역사 연구에서 많이 사용된다. 수정주의적 접근은 특정 사건이나 인물을 보는 사회의 일반적인 관점뿐만 아니라 핵심적이라고 여겨지는 이해의 지점과 평가 내용 등도 바꿀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세대는 나름대로의 수정주의적 역사를 지닐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역사 연구자들도 적지 않다. 특히 영국 혁명이나 프랑스 혁명에 대한 수정주의적 해석은 20세기 중엽에 이미 설득력 있는 연구 동향으로 주목받았다. 박 교수는 에스파냐의 아스테카 정복에 대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일방적 시각과 오해 그리고 잘못된 확증편향에서 벗어나는 것이다”며 “당시 현실에 좀 더 정확히 다가가보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20세기 동아시아 각국의 역사 서술 방식이 강력한 민족주의적 서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동북공정에 대한 우리나라의 대응 방식과 일본의 독도 영유권 야욕은 각국의 민족주의적 이해관계를 강화하는 차원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민족주의적 이해관계를 과도하게 투영하는 것은 진지한 역사 탐구가 아닌 정치적 다툼의 일환이다”며 “동아시아 각국은 언젠가 거대한 수정주의적 접근이 필요할 것이다”고 덧붙였다.

저작권자 © 아주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