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는 거짓이 가득하다. 관계를 맺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거짓이 필요하다. 연락을 닿지 않던 친구와 오랜만에 만났을 때 “넌 잘 지내고 있니”라는 말에 우리는 가끔 뭐라 답해야 할지 고민한다. 잘 지내기도 동시에 잘 지내지 못하고 있기도 한 당신은 결국 대부분 슬쩍 웃어보이며 “잘 지내”라는 말을 뱉을 것이다. 이 말은 진실이지만 동시에 거짓이다. 진실 섞인 거짓을 말하는 이유는 굳이 상대를 걱정하게 하고 싶지도 않으며 구구절절 이야기를 늘어놓고 싶지도 않기 때문이다.

사회생활도 마찬가지다. 사회의 흐름이 원활하게 흘러가도록 나를 잘 숨기고 맞춰야 한다. 그렇게 자신을 감추거나 수정해 적응시킬 수 있는 능력을 흔히 ‘사회생활능력’이라 부른다. 집과 학교에서 배우는 ‘사회화’ 또한 결국 적당히 연기하거나 거짓을 살아낼 수 있는 능력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가족과 연인 사이에서는 어떨까? 가장 믿을 수 있는 집합체로 평가받는 가족과 연인이라는 집합체에서 우리는 항상 진실만을 서술했을까? 우리는 향상 “사랑한다” 말하지만 결국 그 감정은 일관적이지 않다. 언어의 한계일 수도 있지만 감정은 추상적이고 일관적일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상대에게 나의 사랑이 늘 당신을 향하고 있다는 믿음을 주기 위해 사랑한다는 말을 한다. 상대 역시 마찬가지다. 결국 가장 믿을 수 있는 집합체라 여겨지는 관계도 거짓 없이는 지탱될 수 없다.

‘이방인’은 오직 진실하게만 살고 끝없이 사실만을 서술했던 한 인간의 이야기를 담는다. 주인공 뫼르소는 어머니의 죽음 당시 느꼈던 솔직한 감정인 ‘그다지 슬프지 않음’을 그대로 보이며 결국 사형까지 선고받고 만다. 물론 그가 사형을 선고받는 이유는 아랍 남자를 총을 쏘아 죽였다는 점이다. 하지만 책의 배경인 당시의 알제리는 당시 프랑스의 식민지였고 프랑스인이 알제리인을 죽였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2부에서 드러나는 재판의 흐름을 보면 이를 확실히 알 수 있다. 정작 죽은 사람은 아랍인이지만 재판에 있던 사람들이 주목한 것은 뫼르소가 햇볕이 너무 뜨거워서 총을 쐈고 어머니의 죽음 이후 슬픔이 아닌 욕구에 충실했다는 점이었다. 뫼르소가 재판에서 만약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거나 어머니에 대한 슬픔을 드러냈다면 작은 처벌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거짓을 말해야 할 이유를 납득하지 못했다. 그저 느끼는 그대로 살았을 뿐이다.

어린아이였던 우리는 솔직했다. 싫은 것에 싫다고 목소리를 냈고 좋은 것에는 거부감 없이 좋다며 받아드렸다. 세계의 중심은 나였으며 내가 가장 중요한 삶을 살았다. 이후 우리는 조금 더 자라 사춘기를 겪으며 자신이 누구인지 고민하는 시간을 가지게 됐다. 사춘기 시절 우리는 본인이 특별했으면 하고 또 특별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자신은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별다를 게 없다는 사실에 순응해 사회에 소속되며 남들과 같이 어른이 돼 간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거짓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역설적이게 사회는 거짓을 혐오하며 서로를 향해 거짓말을 하지 말자고 하지만 거짓 없는 사회는 되려 재앙에 가깝다. 가끔은 우리 사회 전체와 인간 전체가 어떤 거짓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도대체 이 사회 전체는 무엇을 위해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 거짓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옳은 것은 진실이 아닌 결국 납득이 될만한 거짓뿐이다. 뫼르소는 납득이 될만한 거짓을 말해야하는 사회에서 진실을 말했다. 그의 죽음은 인간 사회에서 타당하다. 뫼르소 또한 이를 알았다. 그는 말한다.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 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 뿐이었다". 그것은 바꿀 수 없는 거짓된 사회를 향한 그의 마지막 예우이자 사회생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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