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다크나이트’는 이분법적으로 나눠져 있는 선과 악 그리고 정의에 대한 담론을 과감히 관객에게 전달한다. 정의로운 검사 하비 덴트는 배트맨과 함께 범죄 소탕 작전을 펼치며 고담시를 지켜 나간다. 궁지에 몰린 범죄 조직은 행동대장인 배트맨을 없애기 위해 조커를 섭외한다. 도시는 다시 혼란에 빠졌고 조커는 배트맨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인다. 배트맨의 정체가 궁금한 조커는 그가 가면을 벗을 때까지 매일 사람들을 죽이겠다고 선포한다. 

조커는 배트맨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사회실험을 진행했다. 그가 ‘악’을 행하는 방법은 독특하다. ‘선’의 인물을 타락시키는 게 그의 가장 큰 오락이자 목적이다. 조커는 시민들을 협박해 두 척의 배를 타게 한다. 사실 한 척에는 일반 시민이 있고 다른 한 척에는 죄수들이 타고 있다. 조커는 두 배에 폭탄을 설치하고 상대방 배의 기폭 장치를 쥐어 준다. 그리고 먼저 기폭장치를 누를 시 살려준다는 조건을 제시한다. 조커는 고담시민들을 두 편으로 갈랐고 당신이 먼저 죽여야만 살 수 있다고 선동한다. 그의 실험은 피실험자에게 두 가지의 선택지를 제시하고 선과 악의 경계에 몰아세운다. 이처럼 조커의 실험은 피실험자에게 이분법적인 선택을 강요한다. 

한국의 정치권과 언론은 ‘조커’스러운 면이 있다. 특히 조커가 피실험자에게 두 가지의 선택지를 준 점과 우리 사회 갈등의 선택지가 유사하다. 그들은 우리에게 이분법적인 사고를 내세워 ‘이대남’과 ‘이대녀’를 탄생시켰고 기성세대와 젋은세대 그리고 부자와 빈자로 편을 나누게 했다. 그저 국민을 반으로 나눠 어디를 선택할 것이냐고 묻는 상황이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는 고담시민처럼 소통하지 않고 있다. 대한민국은 조커의 ‘실험실’과 같다.

실험실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우리도 고담시민의 자세가 필요하다. 영화에서 딜레마를 해결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시민들이 현명하게 조커의 함정을 극복했고 그의 계획은 물거품 됐다. 처음엔 고담시민들은 죄수가 죽는 게 낫다는 공리주의적 원칙이 우세했다. 하지만 고담시민들은 소통을 통한 합리적인 결정과정으로 선과 악의 갈등을 극복했다. 이분법적으로 나뉜 우리 사회에서 갈등이 자연스레 사라지길 바라면 안 된다. 첨예하게 두 가지로 나뉜 세상은 타인을 몰아가기 쉽다.

실험실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선 끊임없는 갑론을박이 필요하다. 각 지역을 기반으로 생긴 정당은 지역주의를 부추겼다. 과거의 정치권은 영남과 호남을 갈랐고 세대를 갈랐으며 최근엔 성별갈등도 조장했다. 지난 20대 대선에서 후보 투표율에 대한 성별차이가 명확했다. 우리는 이분법적인 세계관이라는 틀에 갇혔고 다름을 틀림으로 생각하게 됐다. 고담시민들의 갈등 해결방법은 간단했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를 무시하면 다른 갈등을 낳을 수 있다.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사람과 여러 가지의 인격이 존재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조커의 실험실’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저작권자 © 아주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