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는 조금의 불편함도 용납하지 않게 됐다. 노키즈존과 노중년존 그리고 노교수존까지 한국 사회에 만연한 노OO존은 혐오로 가득 찬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단면을 보여준다. 어느 집단이든 문제를 일으키는 개인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특정 연령대와 지위를 이유로 출입을 제한하는 것은 개인의 문제를 집단의 문제라고 선동해 차별하고 사회에서 배제하는 것이다.

O리단길로 불리며 지역마다 존재하는 ‘핫플레이스’에 위치한 일명 감성 카페와 음식점은 불편하고 조잡한 의자와 깨지기 쉬운 피규어로 채워졌다. 아이들의 놀잇감은 전혀 가져다 놓지 않고 깨질 수 있는 피규어만 잔뜩 가져다 놓았으면서 아이들의 부주의를 질타하고 노키즈존 선언을 통해 출입조차 제한한다. 경기도의 한 캠핑장은 조성된 시설이 40대 이상의 커플에게는 적합하지 않음과 중장년층 고객으로 인해 있었던 폐해를 이유로 들며 노중년존을 선언했다. 문제를 일으키고 민폐를 끼친 소수 중년에 대한 젊은 층의 편견이 한 세대에 대한 고정관념으로 고착된 것이다.

개인주의가 심화되 타인을 향한 무감각은 심해졌지만 불편함은 잘 느끼는 예민한 사회가 됐다. '아이 한 명을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은 아이 한 명이 잘 자라려면 부모 이외에도 수많은 어른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도움이 필요한 이들의 미숙한 행동을 일종의 '빌런 짓'으로 보기 시작했다. 시혜적인 시선은 고사하고 어른의 모습이라는 잣대를 가져다 대는 것이다. 중장년층과 노년층에도 젊은이의 잣대를 가져다 대며 젊은이의 사고방식과 미덕을 강요하고 있다. ‘민폐를 끼친다’ 또는 ‘행동이 느리다’는 프레임을 씌우며 혐오하고 사회에서 배제한다. 결국 노OO존을 만든 것은 문제를 일으킨 개인이 아니라 우리 사회다.

개인은 혼자 살아갈 수 없다. 각자 다른 인격을 가졌다는 것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함께 살아가야 한다. 그렇기에 약간의 불편함은 감수해야 한다. 불편함을 감수하지 않기 위해 특정 집단의 출입을 제한하며 사회에서 배제하는 노OO존은 혐오 사회로의 진보를 가속한다.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혐오와 차별의 대상이 된 아이들이 성장해 이 사회를 이끌 때를 생각해보라. 관용과 이해 속에서 자라지 못한 이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너른 마음으로 약자를 품을 수 있을지는 만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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