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스퀘어’는 위선을 다루는 영화다. 주인공 크리스티안은 스톡홀름 현대 미술관의 수석 큐레이터다. 그는 위선과 편견으로 가득 찬 사람이다. 사회적 체면에만 신경 쓰며 작위적으로 자신을 포장한다. 그가 미술관에 전시한 작품 ‘더 스퀘어’는 ‘신뢰와 배려의 영역으로 이 안에서는 모두 동등한 권리와 의무가 있다’는 슬로건을 내세운다. 정작 그에게 있어 신뢰와 배려는 찾아볼 수 없다. 길거리 빈민들을 무시하며 도움을 요청하는 노숙자에겐 현금이 없다는 핑계를 댄다. 정작 자신이 곤란에 처하자 외면했던 노숙자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그의 모습은 위선적이다.

미술을 다룰 때도 진정한 가치를 설명하기보단 겉으로 보이는 형식적 면모에만 집중하는 주인공의 허영심은 우리나라에도 존재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연예인들의 미술 활동을 천대시하는 몇몇 미술가들의 태도다. 그들은 엘리트주의에 매몰돼 아트테이너들을 일방적으로 깎아내린다. 홍익대학교를 나온 미술가 이규원은 아트테이너 솔비의 그림을 두고 “미대에 가고 싶은 중고등학생 수준”이라며 깎아내렸고 하정우의 그림을 두곤 “인기가 많으니 팬들이 작품을 구매하는 것”이라며 비하했다. 둘 모두 수차례 개인전을 연 엄연한 미술가임에도 이 씨는 연예인들의 미술 작품을 폄하했다. 나얼과 박기웅 역시 그림을 그리는 연예인이지만 그림으로 비판받지 않는다. 미술대학을 졸업했기 때문이다. 미학자 진중권의 말처럼 일부 미술가들은 미대를 신분으로 생각하고 있다.

미술의 가치는 미술대학 졸업장에서 나오지 않는다. 졸업장을 따지는 미술가들의 모습은 눈에 띄는 미술만 강조하던 크리스티안의 모습과 겹쳐 보인다. 누구나 미술가가 될 수 있다. 미술대학을 졸업해야만 작가 자격증이 생기는 게 아니다. 가요계에는 음대를 나온 가수보다 음대를 나오지 않은 가수가 훨씬 많다. 한국을 이끄는 영화감독 박찬욱과 봉준호는 각각 철학과와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하지만 미술계만 유독 미술대학이라는 출신지를 중요하게 여긴다. 고귀하고 도도한 미술가들이 허세에 가득 차 겉보기만 중요시하게 여기는 사이 현대미술에 대한 대중들의 시선은 차갑게 식었다.

미술을 전공한 사람만 알 수 있는 특수성이 있고 그걸 평가하는 건 미술가들의 몫이다. 하지만 그 특수성은 미술계 카르텔이 아니면 끼어들 수 없는 엘리트주의의 장벽으로 전락했다. 그 특수성이 미술을 평가하는 유일한 잣대가 돼선 안된다.

영화 속 크리스티안이 방문한 앤의 집에선 그림을 그리는 침팬지가 등장한다. 침팬지는 실제 있었던 사건을 모티브로 등장한 소재다. 1960년대 프랑스에선 피에르 브라소라는 예술가가 혜성같이 떠올랐다. 미술 평론가들은 브라소의 작품을 뛰어난 그림이라며 극찬했다. 얼마 뒤 브라소는 실존하지 않는 사람이며 스웨덴 저널리스트 오케 악셀손이 침팬지가 그렸다는 게 밝혀졌다. 기준을 가지고 그림을 평가한다는 사람들이 정작 침팬지가 그린 그림과 사람이 그린 그림도 구분하지 못하니 전문성에 있어 비판받을 수밖에 없다.

미술계를 비롯한 예술인들의 위선을 비판한 영화 ‘더 스퀘어’는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예술인들이 모여 특수성을 가진 난해한 작품을 평가한다는 점에서 칸 영화제도 ‘더 스퀘어’의 비판 대상에 포함된다. 심사위원들은 영화를 뜻깊은 충고로 여겼는지 ‘더 스퀘어’에게 최고상을 안겨줬다. 최근 틱톡 단편 영화 부문을 신설하는 등 기존의 딱딱한 예술 영화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매체에 장벽을 열고 있다. 미술계는? 자신만의 예술을 미덕으로 여기고 엘리트주의에 빠져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는 보수주의자들을 쳐내지 않는다면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더 스퀘어’를 보며 반성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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