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8시 나는 아주대학교 병원에 출근한다. 의과대학 혹은 간호대학 학생들처럼 실습이 아닌 단순 아르바이트를 위해 병원 내 중앙창고로 향한다. 내가 하는 일은 의외로 단순하다. 병원 내에 있는 외래병동와 중환자실 등 병원 곳곳을 돌아다니며 필요한 물품들을 전달하는 것이다. 업무의 특성상 살고자 하는 혹은 살리고자 하는 이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광경들을 눈 앞에서 마주한다. 외래병동의 경우 많은 환자들이 오고 가지만 생명이 위독한 이들은 적어서인지 북적북적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에 반해 병동(입원실)은 수술을 받고 온 환자들이나 회복하고 있는 환자들이 주로 있어서인지 분위기 역시 외래병동에 비해서는 다소 차분하고 긴장된 분위기를 느낀다.

이런 긴장감은 위중한 환자들이 있는 중환자실에서 극대화된다. 중환자실에는 사람들의 말소리보다 의식 없는 환자들의 생명 보조 장치 소리가 가득하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상황에 긴장감을 느낀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이런 상황을 매일같이 겪다 보니 점차 무뎌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인간의 삶이 시작되거나 마감하는 모습을 마주할 때는 매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이 교차하며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는다.

한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을 마주하는 공간은 신생아실이다. 짧은 순간에 막 태어나 피부가 쭈글쭈글한 아이가 자신을 알리려는 듯이 힘차게 우는 모습을 마주할 때가 있다. 이때의 신비함을 통해 나는 온몸에 전율이 돋고 알 수 없는 열기가 느껴진다. 그리고 문 앞에서는 아기의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이러한 모습을 보며 나 역시 비슷한 과정을 통해 태어났고 나의 부모님도 아기의 아버지와 같은 감정을 가졌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나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들고 싶다.

이에 반해 한 생명이 생을 마감하는 순간을 마주하는 곳은 엘리베이터 앞이다. 이곳은 종종 ‘점검중’이라는 표시가 나타난다. 나는 처음 이 표시를 보았을 때 기계의 보수가 필요한 상황인 줄 알았다. 그러나 보통 ‘점검중’이라는 표시는 환자가 사망했을 때 시신을 이동하는 경우임을 알게 됐다. 시신이 이동하는 지하 1층과 나의 근무 구역이 겹치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을 종종 마주친다. 이때 시신은 큰 천막이 덮여 있어 확인할 수 없지만 지나갈 때 느껴지는 알 수 없는 한기와 엄숙함으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이때마다 나는 짧은 순간이지만 알 수 없는 무력감과 안타까움 그리고 삶의 이유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위의 상황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상념에 잠기지 않고 단순히 이름 모를 한 사람의 명복을 빈다. 한 생명이 끝날 때 느껴지는 엄숙함과 한기만으로는 생을 마감하는 순간이 안타깝다고 단정지을 수 없다. 또한 무력감을 느끼기에는 매일매일 병원에서 일하는 수많은 이들과 건강한 삶을 위해 병원의 찾는 이들 그리고 생명의 탄생을 보며 삶에 대한 가치가 매우 큰 것임을 느낀다. 이에 나는 ‘아쉬움이 남더라도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가치 있는 삶을 더 잘 살아가는 방법이지 않을까라고 조심스럽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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