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오후 8시 50분경 20대 여성 승객이 달리는 택시에서 뛰어내려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두고 한 언론은 택시 기사와 여성 승객 사이의 소통 부족이 화를 부른 것으로 추정했고, 다른 언론은 근래 일어나고 있는, 여성을 상대로 한 택시 기사의 성희롱 발언 및 범죄를 소개하며 여성들이 택시에서 느끼는 공포감에 주목했다. 경찰 수사가 진행 중이니만큼 인과관계에 대해 속단해서는 안 된다. 다만 경찰은 차량 블랙박스를 토대로 택시 기사와 여성 승객 사이에 소통이 원활하지 못했음을 확인했다. 한 생명을 잃은 안타까운 사건을 두고 누구의 잘잘못을 따질 생각은 없다. 다만 이 사건을 계기로 듣기, 더 나아가 현재 우리나라의 듣기 교육에 대해 질문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미국 코넬대 조직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인 주디 브라운넬은 ‘듣기: 태도, 원리 그리고 기술’에서 듣기 교육의 문제를 지적한 바 있다. 그는 듣기, 말하기, 읽기, 쓰기 중에서 듣기가 습득 순서가 가장 빠르고 사용 빈도가 가장 높음에도 불구하고, 교육 정도가 쓰기, 읽기, 말하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다는 점을 문제로 보았다. 인간은 부모의 말을 들음으로써 언어의 세계에 진입한다. 친구들과 사귈 때는 친구의 말을 듣고, 강의를 들을 때는 교수의 말을 듣고, 조별 과제를 수행할 때는 동료 학생의 말을 듣는다. 이처럼 의사소통의 대부분은 타자의 말을 듣는 것으로 채워진다. 그러나 학생들이 학교에서 쓰기와 읽기, 말하기를 배우는 경우는 있어도 듣기를 배우는 경우는 거의 없다.

브라운넬의 지적은 우리로 하여금 현재 우리나라의 듣기 교육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나라의 대학 과정에서 듣기 교육은 부재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각 대학은 대체로 글쓰기, 발표와 토론, 고전강독 등의 과목을 개설하고 있다. 하지만 듣기를 정규 과목으로 개설한 대학은 없다. 자연히 제대로 된 듣기 교재도 없고, 듣기를 강의할 교수도 없으며, 듣기 교육과 관련한 참고할만한 논문도 거의 없다. 무엇보다 듣기를 배우고 싶다고 요구하는 학생이 없다. 대학의 연구 및 강의에서 듣기는 철저히 무시되고 있는 셈이다. 듣기를 단순 의사소통 또는 친교적 관계 형성의 도구 정도로 보는 사회적 인식에 일차적 원인이 있을 것이다. 다만 듣기가 그런 것인지, 그 정도로 충분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듣기는 청각기관이 음성을 받아들이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듣는 사람은 먼저 외부의 음성을 받아들인다. 이어 그 음성의 의미를 이해하면서 여러 근거를 통해 해석하고 명확한 기준을 들어 평가한다. 마지막으로 상황에 맞게 상대에게 반응한다. 즉 듣기는 ▲청취 ▲이해 ▲해석 ▲평가 ▲반응의 복합적인 과정이다. 듣는 사람은 이 과정에서 대화의 목적, 상대와의 관계, 상대의 컨디션, 상대의 여러 비언어적 표현들뿐만 아니라 대화 시각 장소와 문화 및 사회 분위기까지 고려해야 한다. 여기에 모든 말이 표현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듣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말로 표현될 수 없는 말도 있고, 말로 표현되지 않으려는 말도 있다. 듣기는 들리는 말을 통해 들리지 않는 말까지 듣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때문에 듣는 사람은 자신의 흥미와 관심을 넘어 상대에 대한 이해와 공감으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이번 사건을 돌이켜보건대 듣기에 대한 낮은 사회적 인식과 듣기 교육의 부재가 더욱 아쉽게 다가온다. 밤늦은 시각, 부자유스러운 공간 ▲외부 소음 ▲낯선 타자 ▲택시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련의 사회적 범죄들 등 여러 사항이 충분히 고려된 상태에서, 조금은 조심스러우면서 적극적인 소통이 두 사람 사이에 이루어졌다면 어땠을까. 우리 사회는, 적어도 대학 교육의 당사자들은 이번 사건에 전혀 책임이 없는 것일까. 교육 현장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어찌할 수 없이 여러 질문들이 머릿속을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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