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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가르기에 매몰된 사회, 서로의 목소리를 들어야 할 때
  • 심길호 기자
  • 승인 2022.03.02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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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7년 2월 24일 인조는 삼전도의 굴욕을 겪었다. 당시 명나라와 후금의 패권 경쟁에 대해 조선은 민감하게 반응해야 했다. 후금이 명나라의 국경을 위협하자 명나라는 조선의 출병을 요청했다. 하지만 후금의 성장을 무시할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이에 광해군은 중립외교 정책을 펼쳤다. 이에 서인은 명나라를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북인은 중립을 지키자고 주장했다. 1619년 사르후 전투가 일어나면서 광해군은 강홍립 장군을 출병하여 정세에 따라 항복하도록 지시했다. 서인들은 이를 비난했고 인조반정을 일으켜 광해군 정권을 몰아내고 친명배금 정책을 펼쳤다. 후금은 이에 분노하여 1627년 정묘호란을 일으켰으나 조선과 형제 관계를 맺으며 물러났다. 후금의 국력이 강성해지면서 국호를 ‘청’으로 바뀌고 조선에 군신 관계를 요구했다. 인조 정권은 이를 거부했고 1636년 청나라는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했고 신하들은 척화파와 주화파로 나눠 명과의 의리와 남한산성의 하산 여부를 두고 끊임없이 당쟁했다.

이러한 당쟁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는 거짓 딜레마 현상으로 간단히 설명할 수 있다. 거짓 딜레마 현상은 어떠한 문제 상황에 제3의 선택지는 무시하고 두 가지 선택지 안에서 대답하는 것을 강요하는 이론이다. 병자호란 당시 조선은 이상과 현실을 중점으로 끊임없이 대립했다. 척화파는 명나라의 의리를 근거로 항전을 주장했다. 반면 주화파는 국제 정세의 흐름을 근거로 항복을 주장했다. 물론 당장 전쟁이 일어났을 때 어쩔 수 없는 양자택일의 상황이었다. 문제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 신하들의 태도였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도 ‘중립국화’의 선택지를 충분히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신하들은 각자의 명분을 내세우며 ‘중립국화’의 선택지를 무시했다. 조선은 패배를 맞이했고 이에 대한 대가는 고스란히 백성들에게 돌아갔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편가르기도 제3의 선택지가 분명 존재하고 있음에도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 ▲노사 관계 ▲성별 ▲세대 ▲정치 성향 ▲지역 감정 등을 이유로 벌어지는 갈등들에 사람들은 흑백논리를 펼치기 급급하다. 흑백논리에서 기준이 명확하거나 논리적인 타당성이 있다면 문제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일상에서 일어나는 편가르기에서 기준이 명확하지 않고 타당성 또한 보이지 않는다. 특히 영호남 지역 갈등에서 세력의 이해관계에 따라 영남과 호남으로 나눠 국론을 분열시켰다. 197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영호남 지역 갈등은 이어졌으며 사람들은 영남과 호남에만 집중하고 다 같은 대한민국 국민임을 무시하고 있다. 게다가 영호남 외에 다른 지역도 존재하기에 이러한 지역 갈등은 무의미하다.

내 편이 아니면 모두 네 편이라는 식의 편가르기가 아닌 상대방과 소통하며 존중과 배려를 표시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세상에 찬성과 반대만 존재하지 않음을 인지하고 수용해야 한다. 찬성과 반대만의 입장을 고려하기에 앞서 중립과 합의를 포함한 여러 가지 대안도 개인의 의견을 표출하는데 좋은 수단임을 직시하고 개인들의 여건에 맞게 각자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

심길호 기자  sim980416@ajo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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