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참이라고 할 수 있는 지식은 경험적으로 확인된 것이어야 한다. 경험주의 철학자 흄이 주장한 내용이다. 흄은 지식의 근원을 경험으로 본 결과,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 인과적 필연성(과학)을 거부하는 실수를 범했다. 반면 데카르트는 방법론적 회의를 통해 참이라고 할 수 있는 지식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했다. 사악한 신이 모든 지식을 거짓이라고 속여도 내가 생각한다는 것은 거부할 수 없음을 보여준 것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한 내용은 사악한 신이 속일 수 있다는 점을 간과했다. 이와 같은 ‘무엇이 참인지’에 관한 철학자들의 논쟁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다만 결을 달리해 ‘무엇이 가짜뉴스이고, 가짜뉴스를 어떻게 처벌할지’로 말이다.

가짜뉴스를 처벌하기 위해서는 먼저 무엇이 가짜인지를 확인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말하고 있는 사실이 잘못되었음을 확신할 수 없다. 한때 진리로 받아들여졌던 천동설은 시간이 지나 거짓임이 밝혀졌고, 잔다르크 역시 마녀사냥의 피해자가 되지 않았는가. 과거의 진실은 현재에 의해 부정당할 수 있고, 현재의 진실 역시 미래에 의해 부정당할 수 있다. 우리가 현재 진실이라고 믿는 것은 말 그대로 ‘믿는’ 것이지 실제로는 진실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가짜뉴스를 처벌하기 위한 기준인 진실은 불확실한 기준이며, 이를 토대로 처벌하는 가짜뉴스 처벌법은 옳지 않다. 진실이 거짓으로 믿어지는 시대에 진실을 말했다는 이유로 처벌받을 가능성이 열린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가짜뉴스가 사회 문제를 만든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가짜뉴스는 유권자에게 정책에 대한 오해를 심고 정치인에게 부정적인 프레임을 씌운다. 결과적으로 정치적 신념에 영향을 주어 잘못된 정치적 판단을 만드는 데 기여한다. 하지만 잘못된 생각도 값지다는 존 스튜어트 밀의 통찰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거짓은 진실과 맞서 싸우면서 진실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확인하게 한다. 거짓과 진실이 치고받는 과정에서 진실의 허점을 발견하고 보완할 때, 우리는 더 진실된 사실에 접근할 수 있다. 역으로 진실이라고 인정받았던 것이 사실은 거짓이고, 거짓이라고 취급받았던 것이 진실이 될 수도 있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하는 순간이다. 이처럼 진실에 대한 반박 없이는 새로운 진실이 나타날 수 없다.

따라서 가짜뉴스를 처벌할 것이 아니라 가짜뉴스를 지적할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진실을 찾기 위한 토론을 활성화하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언론사가 다른 언론사의 가짜뉴스를 지적하는 데에 부담 없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단순히 사실을 바로잡는 팩트체크 센터 운영을 넘어 <모 언론사의 몇월 며칠 자 기사 중 잘못된 부분 정정> 등으로 기사를 쓸 수 있어야 한다. 각 언론사가 자신만의 논리로 가짜뉴스를 저격할 때, 허점이 있는 논리가 발견되고 가짜뉴스를 해체할 수 있다. 끊임없이 서로의 의견을 비교하고, 다투고, 설득할 때 비로소 언론은 건강한 공론장으로서 진실을 전달할 수 있다. 이는 언론학자 빌 코바치가 말한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 ‘언론은 시민에게 유용한 공론장 역할을 해야 한다’가 달성되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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