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대학보의 편집자율권을 얻기까지

단재 신채호 선생이 말씀하신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처럼 역사의 중요성은 이루 말할 것이 없다. 우리는 과거를 통해 교훈을 얻으며 현재와 미래를 살아가는 데 있어 보다 현명한 길을 모색할 수 있다. 본보는 올해 창립 40주년을 맞아 특집기획으로 아주대학보사와 아주대학보의 역사를 되짚어 보고 이를 통해 앞으로의 올바른 방향을 모색하고자 한다.

아주대학보사는 아주공업초급대학 개교 일 년 후인 1974년에 창립돼 5월 1일 첫 아주대학보를 발행한다. 보통 대학이 주최해 설립된 대학언론사와는 달리 아주대학보사는 두 명의 학우(이인현, 이양식)에 의해 만들어진다. 당시 2명의 학생은 1년 동안 타 대학의 학보와 교내 언론의 필요성을 언급하며 학교 교수와 당시 중요한 의사결정을 했던 기획처장을 설득해 초기 8명의 학생 기자들의 주도로 발행을 시작한다.
아주대학보사는 ‘실사구시’ 사훈에 입각해 학보를 만들어 왔다. 창간 후 사훈을 바탕으로 가치판단을 했으며 보다 공정한 대학언론으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했다. 이 사훈은 후에 아주대학보사 기자들의 편집권 자율 투쟁을 할 때 하나의 잣대가 되는 판단 기준이 됐다. 학보사가 창설될 당시에는 1970년대로 유신정권 치하였기 때문에 기성언론은 물론 대학언론들도 검열을 피해갈 수 없었다. 당시 학보에는 학외 사안에 대한 기사가 검열의 주 대상이었으며 학보사 담당인 주간교수가 기사를 모두 검토가 비일비재했다.

학보사 기자들의 발행 거부와 단식 투쟁
편집권은 일반적으로 언론사에서 신문편집에 필요한 일체의 권리를 행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언론이 담고 있는 방향과 공공적 목적을 달성하는 데 있어서의 기능이다.
아주대학보의 편집권은 처음부터 아주대학보사에 귀속된 것이 아니었다. 아주대학보가 1호를 시작으로 발행된 후부터 주간교수의 기사에 대한 검열은 지속됐고 학외 사안을 다룬 기사에 대한 검열을 시작으로 학내 사안까지 범위가 확대돼 기사에 대한 수정이 이뤄졌다. 147호 2면에서 ‘미국의 혁명예방과 한국’이라는 기고 글은 원고의 일부가 삭제됐고 148호의 8면에 ‘민족의 정당한 요구, 반핵운동’의 기사 역시 1/3 가량이 삭제된 채 발행됐다. 1986년 아주대학보사는 11월 학생의 날을 앞두고 ‘장을병 교수의 한국 민주주의 과제와 전망’이라는 기사와 ‘시인 김정한 선생의 강연원고’를 기획했으나 사전검열을 받을 때 실리지 못한다는 통보를 들었다. 기자들은 소소한 원고검열들이 계속되고 학생의 날 특집기사들까지 실을 수 없다는 주간교수의 입장을 듣고 학보 발행 거부, 무기한 투쟁, 장문의 대자보, 단식 투쟁, 철야 농성에 들어갔다. 당시 13기 이병원 편집장은 3일 동안 단식농성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학보의 발행 지연과 학보사 기자들의 투쟁을 알게 된 학우들은 그 이유를 궁금해 했고 이에 학보 기자들은 장문의 대자보를 통해 그 동안의 과정을 설명했으며 두 가지 원고가 실릴 때까지 투쟁을 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13기 이병원(기계·84) 편집장은 “당시 시대상황이 전두환 정권이었던 것만큼 독재, 투쟁, 민주화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금지될 정도였다”며 “편집자율권에 대한 보장이 매우 낮아 이를 위해 학보사가 직접 나섰다”고 말했다. 약 2주간의 투쟁 이후 학교는 협상하겠다고 제안했고 삭제된 두 기고 글은 결국 실렸지만 원천적인 해결을 보지는 못했다. 검열은 계속됐다.

아주대학보사의 투쟁 속보 발행

 
 

86년 투쟁 이후 아주대학보사는 또 한 번의 투쟁에 돌입한다. 1992년 학보사 주간교수인 김종철 교수는 1993년 8월 2학기에 실리게 된 화살촉 칼럼에서 학교의 잘못에 대한 내용의 수정을 요구했다. 편집권 침해가 극에 달하자 학보사는 무기한 발행 거부 입장을 밝힌다. 당시 37장의 대자보를 붙였고 일반 학우들의 지지 서명을 받기도 했다. 당시 총학생회를 비롯해 단대 학생회와 동아리 연합회, 각 학과 소학회도 학보사를 지지했다. 이후 학보는 1993년 9월 8일 투쟁속보를 발행한다. 당시 학보가 발행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아주대학보사가 할 수 있는 것은 투쟁속보를 발행하는 것이었다. 예산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십시일반 돈을 모아 투쟁속보에 특별한 이야기보다는 학우들이 보냈던 지지와 서명에 대한 이야기들을 실었다. 투쟁의 성과로 기자들은 학보를 다시 제작할 수 있게 됐고 발행 횟수를 늘릴 수 있었다. 또한 쓰고 싶은 기사를 쓰게 될 수 있었다. 당시 학보사는 문서화된 편집자율권을 얻은 것은 아니었지만 아주대학보사 창립 이래 처음 편집자율권 쟁취의 순간을 맞이했다.

대학언론 최초로 아주대학보사 편집자율권 문서화

 
 

2000년 2월 우리학교 제 6대 총장으로 임명된 김덕중 총장을 놓고 교수협의회, 교직원노동조합, 총학생회를 비롯한 각 단과대학학생회는 퇴진 운동 벌인다. 당시 본보를 담당하고 있던 조성을 주간교수는 김덕중 총장을 발행인으로 하는 학보를 발행하기 싫다며 퇴임해 학보사에 타격을 입혔다. 교협이 총장을 인정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만연했고 편집에 대한 책임이 학보사 편집장에게 결정된 상황이었다. 학교에서는 임시방편으로 학생처장을 주간교수로 임명하며 학보 제작 중단 공고를 내렸다. 당시 27기 박찬규 편집장은 2면으로 제작된 호외를 발행했다. 2000년 3월 22일 호외판에는 김덕중 총장의 재취임 반대하는 학우들의 목소리가 실렸다. 편집장은 학보는 학우들의 알권리를 위해 학내 사안을 알려야 하며 이에 발행을 결심하게 됐다. 호외판 발행에 대해 학교는 박찬규 편집장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고 3개월간 학보의 발행을 중단시켰다. 당시 박찬규(국문) 편집장은 “학보가 한 장인 호외판을 8천 부 발행하기 위해 경기도의 인쇄소를 알아보고 다니며 직접 기자들이 배부하며 돌아다녔다”며 “호외 발행 후 3개월 동안 학보를 발행을 할 수 없었지만 매일 회의를 하며 당시 학내사안에 대해 상황보고를 했다”고 말했다.
이후 학생처장과 편집장과의 면담을 통해 아주대학보사는 편집권 보장, 민주적 사칙 제정, 학생처장 주간교수 불가라는 세 가지 조건에 대해 협의했다. 이를 통해 편집권이 편집국에 귀속돼 아주대학보사는 자체 규정을 획득하고 명실상부한 독립 언론기관으로 자리잡게 됐다. 창간 이후, 정확히 26년만에 학보사는 편집 자율권을 온전히 보장받게 됐고 그 이후 편집권 침해는 없었다. 또한 우리 학교는 대학언론 중 최초로 편집 자율권을 보장받게 됐다. 편집 자율권은 학보사 창립 아래 선배들의 포기하지 않는 투쟁의 결과물이었고 치열한 역사 그 자체였다.

아주대학보사의 현위치는
아주대학보사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학우들의 알권리와 진정한 대학언론의 모습을 지키기 위해 투쟁해온 노력 덕분에 올해 창간 40주년을 맞이했다. 지난 학보의 흔적을 되짚어 봤을 때 대학언론은 매 호를 발행할 때마다 크고 작은 위기에 직면했고 각각의 발행에는 기자들의 땀과 포기할 줄 모르는 끈기와 노력이 과거 아주대학보는 편집에 대한 자율권 보장을 위해 투쟁했다면 현재 학보사는 새로운 문제에 직면해 있다. 이는 아주대학보사만의 문제점이 아닌 전반적인 ‘대학언론의 위기’라 말해진다.
현재 학내 사안에 대한 학우들의 관심도는 점점 낮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구독률 하락, 인력난 가중, 예산 감소 등으로 학내 언론사는 과거와는 다른 어려움을 대면하고 있다. 지난 본보의 구독률을 통계로 낸 자료에 의하면 학보의 구독률은 2004년 61%, 2008년 55.8%, 2009년 35%, 2011년 52.1%, 2012년 48.5%로 집계됐다. 올해 설문조사를 바탕으로 한 구독률은 42.5%로 나타나 점차 구독률이 감소하는 추이를 보인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아주대학보사는 다양한 면 구성, 컨텐츠 확보, 온라인 홈페이지 구축 등 여러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상황이다. 

참고자료 : 아주대학보사 다큐멘터리(2009)

저작권자 © 아주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