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신의 자발적 유보’라는 용어가 있다. 문학이나 영화 등 허구를 대할 때 독자나 관객이 취하는 태도를 일컫는다. 현실처럼 받아들여 그것에 몰입하고 즐기기 위해, 그 허구가 진실이 아니라고 불신하는 것을 잠시 미루어두는 것을 뜻한다. 만일 영화 어벤져스 시리즈를 대할 때, ‘뭐야, 저게 말이 돼?’라고 코웃음을 치면서 고개를 젓고 있으면 그 영화를 온전히 즐기기 어렵다. 반대로, 영화를 감상하는 동안 그 세계관과 캐릭터들을 받아들이면, 캐릭터의 갈등과 위기 극복의 이야기에서 여러 감정과 쾌락을 즐길 수 있게 된다.

COVID-19의 유행이 여전히 진행 중이다. 전 세계적으로 확진자 수가 2천3백만 명 사망자 수가 80만 명을 넘었다. 광복절을 지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신규 확진자가 다시 폭증하는 추세다. 불안과 의심들도 확산되고 있다. 이 상황을 종식시킬 백신이 언제 개발될 것인가는 초미의 관심사다. 최근 며칠 사이에 미국과 중국의 제약회사들이 백신 임상시험 마지막 단계인 3상 시험에 돌입한다는 기사가 실렸고, 러시아가 3상 임상시험을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백신을 세계 최초로 승인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우리 정부도 백신 도입을 본격 추진하기로 하고 국산 치료제 및 백신 개발에 비용을 지원하기로 했다는 뉴스도 있었다. 얼핏 들으면 반가운 소식들 같다.

이번 바이러스 대유행에 재조명을 받은 인물은 단연 빌 게이츠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업자로 유명한 그가 이미 수년 전부터 바이러스 전염병의 대위험을 경고해 왔고, 부부의 이름을 딴 재단을 통해 백신 개발에 거액을 지원해 왔다는 것은 놀라워 보였다. 여러 언론 미디어가 앞다투어 빌 게이츠의 선견지명을 소개했다. 빌 게이츠의 선행을 사례로 부자의 품격을 논한 논설도 있었다.

한편 소셜 미디어를 중심으로 몇몇 문제 혹은 음모론이 제기되었다. 예를 들면, 미국인이자 도미니카공화국에 거주 중인 내과 의사 캐리 마디는 COVID-19 백신이 RNA/DNA 조작으로 만들어져서 앞으로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 모르는 상황에서 승인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제약회사는 그 약효에 대해 소송과 책임을 면할 면죄부를 받고 있음을 폭로하는 영상을 포스팅했다. 또 다른 영상에서, 그녀는 확진자 수에 대한 과장과 통계 오류의 근거들을 제시하고, 그러한 통계에 기반해 백신 접종 필수화를 통해 자유를 억압하려는 시도가 있음을 주장하면서, 이 모든 상황의 근저에 제조회사, 국제기구, 단체 등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음을 암시했다. 그녀는 이런 백신을 개발하는 곳이 빌 게이츠의 지원을 받고 있다는 것을 언급하고, 그들이 사람들의 유전자 조작을 실험하거나 마이크로 칩을 심어 거대한 통제 사회를 만들려 한다는 음모론을 제기했다. 6월에 실린 BBC 뉴스에 따르면, 코로나바이러스와 빌 게이츠 연관 음모론은 2월에서 4월 사이에 TV와 소셜 미디어에서 120만 번 언급되었고, 상당수가 페이스북 그룹에 공개 포스팅되어 수백만 번 공유되었다. 빌 게이츠가 인류에 마이크로 칩 이식 계획을 갖고 있다는 동영상 역시 유튜브에서 200만 회 이상 시청되었다고 한다. 결코 동의할 일이 아니지만, 소위 코로나 파티를 벌이는 일부 사람들의 객기가 어떻게 발생했는지는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막연한 생각이겠으나, 나는 빌 게이츠의 개인적 선의를 의심하지 않고 있다. 캐리 마디가 제시한 통계상의 오류나 과장의 팩트들도 부인할 마음이 없다. 세상사의 배후에 여러 주체들의 이권이 복잡하게 얽혀 있으리라는 점도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대중/개인 미디어가 다루는 사실과 정보는 비판적 사고와 의심의 대상이 될 필요가 있다. 그것에는 주관적 관점이 내포되어 있고, 그 사실과 정보에 가려진 진실이 있을 수 있으며, 판단과 추론의 오류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허구를 대할 때 유보해야 하는 것이 불신이라면, 현실을 다루는 미디어를 대할 때 유보해야 하는 것은 신뢰이다. 이것은 허구와 진실의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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