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옛날 천하의 부귀를 누린 어느 왕은 평생 불멸을 염원했다. 그는 실패했고 죽음은 그의 눈과 코를 뒤덮고 땅속에 묻었다. 그리하여 불멸은 인간성의 정반대에 존재하는 것이며 신성과 같은 뜻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예술가는 불멸한다. 그들은 자신이 몸담은 세상에 작품을 내놓고 육체가 사라진 후에도 그것을 통해 남은 사람들과 끊임없이 대화한다. 작품과 더불어 그의 생애도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며 새로운 예술가를 탄생시킨다.

여기 삶 자체가 화폭에서 이뤄진 예술가가 있다. 바로 ‘베르나르 뷔페’다. 불우했던 어린 시절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해 최고의 부와 명성을 누리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뷔페의 이야기를 담은 전시 ‘베르나르 뷔페 전’에 다녀왔다. 생애가 인상적인 작가답게 이번 전시는 뷔페의 유년부터 말년까지 시간순으로 구성됐다.


 

베르나르 뷔페 그는 누구인가

베르나르 뷔페는 1982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한량이었던 아버지는 가정에 소홀했고 어머니 홀로 뷔페를 키운다. 매우 가난하고 어려운 생활이었지만 어머니는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울 만큼 충만한 사랑을 뷔페에게 줬고 어머니의 사랑에 의지해 어린 뷔페는 성장해간다. 일찌감치 그림에 재능을 보인 뷔페는 15살에 프랑스 최고의 미술 학교인 파리 에콜 데 보자르에 전례 없는 조기입학을 하게 된다. 이곳에서 뷔페는 정식으로 그림을 익히고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파리가 나치에 점령되고 극심한 굶주림의 시기가 도시를 덮친다. 그 여파로 뷔페의 초기작은 사람과 사물을 가리지 않고 모두 말라비틀어지고 피폐한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 시기에 뷔페는 정물화를 주로 그렸는데「테이블과 의자(Table et chaise)」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유리병과 와인잔이 비어있고 테이블 위에 놓인 과일들도 모두 말라 있다. ‘비어있음’과 ‘말라감’ 그리고 ‘죽어감’ 등의 키워드는 그의 인물화에서 더욱 극적으로 표현된다. 특유의 두껍고 거친 직선으로 표현된 볼품없는 육체는 전쟁 당시의 황폐함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침울한 표정과 빗나간 초점은 그로테스크함을 더 해준다. 뷔페의 작품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그의 작품 중에서「이젤과 자화상(Autoportrait au chevealet)」을 포함한 인물화를 보고 유독 불편한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이런 극단적 표현을 과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파리 사람들은 작품 속 인물 묘사를 보고 너도나도 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 후 뷔페는 진정한 ‘20세기의 증인’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이와 더불어 이 시기의 작품의 또 다른 상징적 특징은 바로 ‘배경’이다. 그는 배경에 물감을 칠한 후 그 부분을 다시 긁어놓았는데 이는 물감을 아끼기 위해서다. 가난했던 뷔페는 그림을 그리는데 사용되는 재료를 직접 구입하지 못했고 모두 주변에서 얻어서 사용했기 때문에 물감을 아주 얇게 칠한 후 긁음으로써 물감을 아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작품의 배경에 있는 긁힌 자국들은 뷔페의 유년의 아픔을 상징한다.

 

스타의 탄생과 몰락 

1945년 프랑스에서는 축제의 물결이 일었다. 세계대전이 끝났기 때문이다. 전쟁의 고통에서 벗어나 온 도시가 희망으로 가득 차있을 무렵 뷔페는 인생의 가장 큰 고비를 맞는다. 바로 어머니의 죽음이다. 어머니가 떠난 뒤 극도의 슬픔속에서 뷔페는 세상과 담을 쌓고 그림에만 몰두했다. 오직 그림을 그릴때에만 어머니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세상에 다시 나온 것은 그로부터 1년 후, 그의 나이 18세때 였다. 뷔페는 여전히 혼자였지만 그의 손에는 세상을 놀라게 할 수 점의 작품이 들려있었다.

18세에 처음 작품을 선보인 후 20살의 나이에 뷔페는 비평가들이 예술가에게 주는 가장 영광스러운 상인 <비평가상>을 수여한다. 뷔페는 <비평가상>의 최연소 수상자였으며 지금까지도 이 기록은 깨지지 않았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뷔페는 겨우 22살의 나이에 백만장자가 됐다. 그래서인지 또한 이 시기의 그의 작품은 변화를 맞이한다. 경제적 여건이 좋아져 색채가 살아나고 유화 물감을 겹겹이 쌓아 질감을 표현하는 임패스토 등 다양한 미술적 기법을 시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때 뷔페는 그의 예술적 뮤즈이자 영감의 원천인 ‘아나벨’을 만난다. 단테에게 베아트리체의 존재처럼 뷔페에게 영원한 사랑의 존재인 아나벨. 그들은 이 후 40년을 함께 살며 죽음에 이르기까지 서로를 사랑한다. 아나벨은 파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라 불릴만한 미모의 소유자였으며 동시에 훌륭한 작가였다. 특유의 수려하고 섬세한 문체로 아나벨은 뷔페 전시의 서문을 작성하기도 하고 때때로 그와 함께 보낸 시간을 글로 남겨두기도 했다. 전시를 둘러보면 뷔페를 기리는 글귀가 작품과 함께 배치돼있다. 전시에 사용된 문구 중 80%이상이 아나벨 뷔페의 글로 채워진 것 또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뷔페가 죽은 후 19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그의 명성은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 뷔페의 인기가 정점에 다다랐을 무렵 그에게 왕관을 씌워줬던 화단의 평론가들은 돌연 그를 비난하고 나섰다. 그들은 그가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기며 돈을 먼저 받고 작품을 그려주는 등 상업적으로 변했다고 폭로했다. 하지만 당시 돈을 받고 그림을 그리던 것은 뷔페만이 아니였다. 심지어 자신의 유년시절 꿈이었던 성을 구입한 것과 작품의 영감을 얻기 위한 차를 산 것 외에는 사치스럽다는 비난의 형체도 모호한 상황이었다. 이에 미술계가 추상회화를 추구해가던 시기에 구상주의를 유지했기 때문이라는 분석 최근 들어 힘을 얻고 있다. 이때 평론가들의 기세에 힘입어 대중들은 더욱 격렬하게 뷔페를 비난했다. 이러한 명성의 추락은 현재 우리에게 뷔페가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 중 하나다.

 

예술가의 사명과 죽음

여느 천재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뷔페의 죽음 또한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때는 21세기를 앞둔 세기말. 파킨슨병 진단을 받은 뷔페는 거동이 불편해 넘어져 손을 다치게 되고 더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을 지경에 이른다. 매일 10시간 이상 그림을 그려온 뷔페는 그 사실에 좌절한다. 새천년을 코앞에 둔 1999년 그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평소와 같이 아내와 아침식사를 한 후 집 앞 산책을 나서고 자신의 작업실에 들어간 뷔페는 비닐봉지를 뒤집어 쓴 채 자신의 작품들 사이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뷔페에게 있어 죽음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어린나이부터 전쟁 속에서 죽음을 목도한 뷔페는 그 후에도 늘 죽음에 쫒기며 살았다고 증언했다. 생전 하나의 주제를 잡아 연작으로 작품을 선보였던 뷔페는 자신의 마지막 시리즈의 주제로 ‘죽음’을 택한다.

뷔페의 죽음과 관련된 작품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브르타뉴의 폭풍(Tempete en bretagne)」이다. 브르타뉴 해변에 어두운 폭풍이 몰아치고 노란빛을 띄는 배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가라앉고 있는 상태가 묘사돼있다. 브르타뉴 해변은 뷔페에게 어머니의 사랑을 상징하는 곳이다. 생전 어머니가 어린 뷔페를 찾았던 곳이 바로 이 곳 브르타뉴 해변이라고 한다. 뷔페는 어머니에 대한 추억을 담아 종종 브르타뉴 해변을 그리기도 했는데 그의 작품 중 폭풍이 몰아치는 브르타뉴 해변은 이 작품이 처음이었다고 한다. 이를 본 아나벨은 뷔페의 죽음을 짐작하고 집 안의 날카로운 것들을 모두 버렸다는 일화도 있다.

<죽음>시리즈에서 뷔페는 죽은 것의 상징인 해골을 작품에 등장시키고 해골에 심장 등 장기를 그려놓았다. 그가 죽음의 순간 생명의 상징을 남겨놓은 것은 분명 자신의 육신이 떠난 후 남겨질 작품들 그리고 그로 인한 불멸을 예견했던 것이다.

 

“다시 태어난다면 어떤 삶을 살고싶으세요?” “저는 예술가의 삶입니다“ 도슨트의 마지막 말이다. 뷔페의 작품세계 뿐아니라 그가 예술에 가졌던 신념은 보는 이로 하여금 예술가의 삶을 꿈꾸게 한다. 진정한 예술의 열정과 깊이를 느끼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완벽한 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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