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기억에 남는 책 출판 광고 하나를 읽었다. ‘이번 책은 마른 수건에서 한 바가지 물을 짜낸 결과물입니다’라고 쓰인 추천사가 그 책을 기억하게 만들었다. 기사를 쓰는 것도 ‘마른 수건에서 물을 짜내는 일’이다. 보도와 학내 기획은 소재 선정부터 취재까지 모두 학교 내에서 이뤄져야 한다. 그러나 학내 이슈들은 한정적이어서 소재 찾는 것이 쉽지 않을뿐더러 주변을 수소문해 취재원을 찾는 일은 더욱 만만치 않다. 늘 다양하고 적절한 취재원을 찾아 인터뷰하는 일은 상당한 수고가 필요해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찾기 쉬운 정보를 찾는 것에 치중했다.

족보 기획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족보가 관행처럼 굳어진 것은 윤리적인 문제라고 생각했고 이에 대한 근거를 얻고자 우리 학교에서 윤리 수업을 담당하고 계시는 모든 교수님께 인터뷰 요청 메일을 보냈다. 교수님들의 인터뷰가 꼭 필요하다기 보다도 적당하게 지면을 채우기 쉬운 수단일 것 같아 선택한 길이었다. 다음날 한 교수님의 답신을 받았다. 일선 기자 경험이 있다고 말씀하신 교수님은 내 기사가 편의주의를 쫓는 기사라고 하셨다. 순간 머리가 띵했다. 나의 행동이 나의 초심과는 정반대되는 단어로 정의된 기분이었다. 교수님께서는 내가 보낸 한 페이지 분량의 글에 한 줄 한 줄 논리를 지적하는 코멘트를 달아주셨다. 그 코멘트들은 모두 고개가 끄덕여질만해서 내가 얼마나 쉽게 좋은 기사를 얻으려고 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결국 코앞에 닥친 마감에 쫓겨 족보 기사를 만족할 만큼 수정하지 못했지만 그날 이후 기사를 고민하는 마음에는 큰 변화가 생겼다. 학내 기자의 역할은 물 한 방울 짜기 힘든 마른 수건일 수 있다. 그러나 한 호의 신문이 발행되기 위해서는 마른 수건에서 한바가지 물을 짜내는 노력이 필요하며 신문의 깊이는 그 노력에 비례한다. 마른 수건을 힘차게 비틀었을 때 물이 조금이라도 나온다면 우리는 또 다시 발로 뛰어야한다. 해볼 만큼 다 해봤다는 노력이 아니라면 물바가지는 아직 채워지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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