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나타나 삶을 통째로 흔들어 놓는 악운은 우리로 하여금 삶에의 의지를 저버리게 하고 땅 위에 자리한 모든 것의 의미를 앗아간다. 고통의 한 가운데서 우리는 자문한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따스한 샌디에이고 연안의 큰 저택에서 자란 귀족 개 ‘벅’은 금광 열풍에 덩달아 뛰어버린 썰매 개 값을 노린 가정부에 의해 납치되어 북극으로 보내진다. 자신을 향한 사람의 손길이란 오로지 먹이와 빗질 밖에 없고 당연히 사람을 공격해본 적 없는 벅은 목을 조르는 쇠 목줄의 무게와 옆구리를 강타하는 곤봉 세례가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이 왜 이곳에 와있는지 물어보지만 그가 알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때부터 시작된 북극의 삶은 고통 그 자체였다. 늘 살인적인 이동 거리와 굶주림 그리고 추위에 떨던 벅은 점차 그곳의 법칙에 적응해간다. 

주인의 매서운 곤봉과 경쟁자들의 송곳니가 지배하는 적막한 북극. 그곳은 조던 피터슨 교수가 말하는 ‘혼돈’과 ‘질서’의 세계이다. 질서는 이미 알고 있는 것과 안정의 토대이다. 반면 혼돈은 무지의 상태이며 두려움의 근원이다. 벅에게 질서는 보장된 영역인 푸른 정원과 벽난로의 온기였다. 주인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 집 안의 다른 사람보다 우위 행세를 하던 벅에게 북극에서의 삶은 생전 처음 겪어보는 것 그리고 고통을 수반하는 혼돈이었다. 

익숙한 것에서 미지의 세계로의 여정은 벅에게만 일어난 특수한 일이 아니다. 대학이라는 새로운 세계로 발을 디딘 우리 또한 이미 경험했다. 대입이라는 명확한 목표와 안정된 통제가 있었던 고교 시절을 지나 도착한 대학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주는 사람이 없다. 어떤 목표를 향해 달려갈지 무한정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운용할지 어느 하나 확실한 것이 없다. 

조던 피터슨 교수는 이러한 방황의 해독제로 ‘의미’를 제시한다. 의미를 상실한 채 고통을 마주한 사람은 그것을 회피하며 원초적인 쾌락에 집중하게 된다. 회피의 근거는 ‘현재를 살기 위해서’다. 그것은 본능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자신을 속이는 것이며 충동을 조절하지 못하는 무책임한 선택이다. 의미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위해 본능을 통제하고 자기 기만의 편의주의를 극복할 때 생기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는 삶을 지속하게 한다. 

처절한 상황에서도 벅은 결국 살아남는다. 그리고 안락한 환경에 가려있던 자신의 본성을 찾아간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불평하기만 하면 상황은 바뀌지 않는다. 삶이 불가피한 고통의 연속이라면 그것을 최소화할 수 있는 행동을 하는 것이 의미 있는 삶이다. 혼돈과 함께 춤을 추는 방법을 깨우칠 때 우리는 자기 자신을 책임지는 영웅적인 삶을 살아가 수 있고 그것은 우리의 본성이며 이미 우리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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