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3월 1일 제주 북초등학교 3.1절 기념식에서 한 아이가 기마 경관의 말발굽에 치였다. 사건을 목격한 군중은 흥분해 경찰서로 몰려갔지만 이를 경찰서 습격으로 오인한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해 시민 6명이 죽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우익 정권에 대한 분노와 대기근에서 비롯된 절박함이 뒤섞인 채 1948년 4월 3일 제주도 남조선노동당(이하 남로당) 당원 일부를 포함한 몇몇 시민들이 무장하고 경찰지서 12곳을 급습한 것이 4·3사건의 시작이었다.

사건의 시작은 정치적이었으나 그 책임은 정치와 무관한 일반인에게로 전가됐다. 이승만과 미군정은 제주도를 ‘소위’ 빨갱이 소굴로 낙인찍었다. 이승만의 극우조직 서북청년단과 미군은 이를 정권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해 이후 6년간 제주도민들을 학살했다. 4·3사건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잊혀진 ‘국가폭력’ 사건이다.

이후 4·3사건은 지워졌다. 4·3사건의 사망자는 대략 1만 4천여 명 이상으로 추정되지만 4·3사건에 대한 인지도는 다른 역사적 사건들보다 현저히 떨어진다. 이후 정권이 바뀌며 4·3사건의 진실이 하나둘씩 밝혀지기 시작했지만 국가가 국가폭력에 대한 자신의 과오를 인정한 것은 아니다. 4·3사건에서 시작된 국가폭력은 반복됐다. 5·18의 광주와 백남기 농민의 사망에 이르기까지 국가라는 이름 아래 자행되는 폭력은 굉장히 비슷하다. 4·3사건에서 제주도민들은 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죽었다. 광주의 사람들은 민주화를 외쳤다는 이유로 총에 맞았고 쌀 시장 개방에 분노했다는 이유로 백남기 농민은 폭력 시위꾼으로 취급당해 물대포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4·3사건을 이승만 개인의 일탈로 치부할 때 이러한 폭력의 연쇄는 외면받는다.

국가 폭력의 현장에서 우리는 피해자들을 희생자들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 희생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국가 폭력에서 피해자는 있지만 가해자는 없다. 제주도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던 서북청년단 일원들은 나라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았고 4·3사건의 피해자들은 국가 유공자로 인정받았다. 피해자에 대한 예우와 개인의 이야기는 그렇게 잊혀지고 국가라는 시스템을 더욱 견고히 하는 도구로서만 사용될 뿐이다. 4·3사건의 피해자들은 국가를 위해 죽은 사람들이 아니다. 살고자 했던 무고한 사람들을 죽인 국가는 그들이 국가를 위해 죽었다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 시절 무고한 사람들의 죽음을 잊어선 안된다. 우리가 ‘국가를 위해’라는 말 속에서 어떤 가치를 잃어가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한다. 한 사람의 생명보다 위대한 가치는 흔하지 않다. 수천 수만명이 죽은 이 날을 우리 사회가 보다 깊이 기억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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